이 글은 부활절 고난기간을 맞이하여 신약 성경에 나오는 대제사장 가야바란 인물의 신념과 비극에 대해 묵상한 글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신념과 비극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장 45절부터 보면, 아주 특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와 바리새인들이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회’는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쉬네드리온)를 가리킵니다. 이는 대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 등으로 구성된 예루살렘의 최고 종교·사법 기구였습니다. 산헤드린은 민수기 11:16의 70인 장로 제도를 후대 유대 전통에서 그 기원으로 이해하였고,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지도 체제가 신구약 중간기에 본격적인 산헤드린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종교적·내부적 문제에 대한 최고 기관으로서 기능했으며,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뒤 사형 집행 권한을 가진 로마 총독에게 넘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가야바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발언은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보였는데, 그 중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사건으로 인해 민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아 로마에 대항할까 염려하던 상황에서 나온 대안이었습니다. 이 발언을 한 줄로 정리하면 “그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가 될 것입니다.
그의 발언은 공회 특성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조잡한 표현이 아니라, 권위를 담아 고급스럽게 표현되었을 것이며, 대제사장의 말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력을 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 끝에 정리된 신념의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혹시 그 당시 대제사장이 “우리 민족을 위해 예수란 자가 죽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을 하나님께 기도로 올렸을까요, 안 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기록하지 않지만, 대제사장의 위치와 공회의 종교적 성격을 고려할 때 그의 신념에 따른 기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기도를 했다면 “예수란 자로 인해 우리 민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우리 백성을 위하여 죽게 하여 우리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맥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을 믿음의 기도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바라보았다면 예수께서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민족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야바가 원한 예수님의 죽음은 정치적 죽음이었고, 대속적 죽음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속국 상태에서라도 종교적 자유와 현 체제가 유지되기를 바랐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속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이것과 관련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한 11:51~52)
마치 이 구절은 그가 대제사장이기에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이와 같이 해석하여 말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가 위의 내용과 같은 의미를 담고 말을 했다면 믿음의 눈으로 말한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자신의 역할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 비록 악역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맡겨진 역할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직접 장례를 돕거나 사람들을 시켜 유향을 바르게 했을 것이며, 무덤에 와서 경배를 드렸을 것이고, 부활하셨을 때 찾아 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측면에서 전혀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문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문장을 헬라어 원문 등을 참고하여 살펴볼 때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는 이 말을 자기 생각에서 한 것이 아니었다”가 됩니다.
즉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는 가야바가 믿음을 따라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표현했을 뿐인데, 그 표현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단히 의미 있는 내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말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한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즉 같은 말도 신념으로 받아들이면 한낯 정치적 죽음으로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말 속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심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가야바는 그의 신념에 따라 기도하고 행동하였기에 그는 그 당시 하나님께 ‘예수를 죽일 수 있어 감사하다’란 기도를 했을 것이며 그것에 대해 죄책감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믿음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로서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이지만, 가야바에게는 자신을 망하게 한 비극의 사건이 되었고 또한 예수님을 죽인 악인으로 영원히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신념을 따라 한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러하기에 그가 한 행동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저 노회한 정치적 신념의 발현일 뿐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이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이 말씀을 우리들의 삶에 무엇을 적용하여야 할까요?
저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고 답한다면 의미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신념들이 믿음과 서로 갈등하는 장면들이 될 것입니다. 먼저 아래의 항목들을 살펴보시고 할 수 있으면 더 확장하여 살펴본다면 좋겠습니다.
1) 가야바는 민족을 지키겠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예수의 죽음을 결의한다. 그러나 그 신념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나는 내 확신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검증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신념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고 있는가? ( )
2) 공회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로마의 압제를 피하려는 계산 속에서 결정을 내린다.
나는 두려움과 현실적 계산 속에서 선택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결정을 내리고 있는가? ( )
3) 가야바는 자신의 기득권과 체제를 유지하려는 열심 속에서 기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믿음이 아니라 신념의 발현이었다.
나는 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믿음의 기도인가, 아니면 내 신념과 욕심을 정당화하는 기도인가? ( )
4) 요한은 가야바의 발언을 단순한 정치적 말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드러내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나는 세상의 말과 사건을 단순히 현실로만 보는가, 아니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가? ( )
5) 가야바는 예수님의 죽음을 민족 보존의 수단으로 삼았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을 모든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속의 사건으로 사용하셨다.
나는 내 삶의 사건을 인간적 수단으로만 해석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가? ( )
6) 예수님의 죽음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은혜의 사건이지만, 가야바에게는 자신을 망하게 한 비극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은혜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내 관점과 신념 때문에 그것을 비극으로만 보는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