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무의식적으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닷가에서 1주일 동안 있었을 때 처음에는 김남조 시, 송창식 곡의 그대 있음에가 그랬었지요.
또한 이번에는 서정주 시, 송창식 곡의 ‘푸르른 날’ 역시 그랬습니다. 1주일이 모두 끝나가는 날, 이제는 바다와 작별을 해야 할 때 그랬지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많이 무거워 졌을 때 ,그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어떤 노래가 일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워낙 미약했기에 무슨 노래인지 몰랐지만 계속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노래, 점점 누구의 목소리와 함께 일렁거렸지요.
왠지 친숙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워하자’란 가사가 있는 듯했는데 뒤로 갈수록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이 좀 더 또렷하게 들렸으며 그때부터 이것이 무한반복 되었지요.
1. 송창식의 ‘푸르른 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노래 역시 제가 대학교를 재수할 때 약 4개월 머물렀던 선배의 집에서 레코드를 통해 들었던 노래였지요. 집에 와서 찾아 보니 가수 송창식님의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의 목소리 주인공은 송창식님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미당 서정주’님의 시지요. 1940대에 쓰고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시를 좀처럼 노래 가사로 내놓지 않았던 서정주님이 송창식님에게 ‘이 시 어때?’하며 내밀었다는 일화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 노래가 제 마음을 계속 두드린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요?
아마도 그 당시 선배가 송창식님의 LP판 노래들을 자주 들어서 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제 나이나 저의 감성으로 보았을 때 좀더 서정적인 노래들, 예를 들어 송창식님의 초기 작품이었던 ‘딩동뎅 지난 여름’, ‘꽃보다 소녀’, ‘새는’과 같은 노래들이 제 취향에 더 맞았습니다. 이 노래들은 가사를 거의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도 흥얼거릴 때가 많지요.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리면 그때 듣고 불렀던 이러한 노래들은 고스란히 저의 ‘전의식’에 남겨져 있었기에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지만, ‘푸르른 날’은 전의식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이란 곳에 보관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 왜 이것이 기억에서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저의 머리 한자락에 남아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니 그 이유는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이란 ‘삶과 죽음’이란 주제와 무관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20세가 조금 안된 그 때에도 이런 주제에 민감하였던 나로선 매우 낯설기만 한 죽음이란 것을 마음 한 쪽으론 피했지만 어느 쪽에서는 그것을 마주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미당 서정주님의 시 ‘푸르른 날’
서정주님이 쓴 시 전문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시의 분위기는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가을날, 눈이 부시게 하늘이 파랗고 햇살이 빛나는 어느 오후, 불현듯 그리운 한 사람이 마음에 찾아옵니다.
평소에는 바빠 그 사람 생각이 정지되곤 했었는데, 한가로이 햇빛을 가득 머문 하늘을 바라보는 어느 날,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죄 받을 것 같고 한편으론 매우 미안한 감정이 있었기에 그 사람을 떠올립니다.
좀 더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니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엊그제만 해도 마냥 푸르다고만 생각했던 나무들이 벌써 노랗게, 빨갛게 물들어 있습니다. ‘아’하는 한탄조와 함께 들숨과 날숨을 깊이 쉬어 봅니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흘러 가는데… 또 짐짓 딴 일에 몰두하면 눈이 내리고 또 무엇을 한다고 머뭇거리는 사이 봄이 올 것이고…
다시 깊이 한숨을 쉬는데 다시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
‘내가 죽고 당신이 살아난다면, 아니 반대로 당신이 죽고 내가 산다면…’
마음이 갑자기 애틋해집니다.
당신이 죽거나 혹은 내가 죽어도,
당신이 이 세상에 없거나 혹은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아, 이것은 너무 안타깝고 아픈 일인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세상 혼자 모든 것을 하는 양, 딴 짓하고 잊고 살고 있는 나.
이러면 안 되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어떻게 될 지 모른 험난한 세상, 정말 소중한 사람과 영영 헤어지기 전에 정말 그리워하듯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구나.
이 시는 미당 서정주님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 1938년에 결혼하고 한 평생 함께 살아온 아내에 대해, 자신의 무심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시가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3. 푸르른 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왜 송창식님의 이 노래가 제 마음을 두드렸을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과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실제 제 무의식에 흐른 것은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이었지요. 그런데 원문은 그게 아니더군요.
아마 이 가사가 내 머리 속에 계속 흘렀던 것은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과 같이 죽음에 대해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5~6년 전부터인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 때는 인문학적이나 신학적 측면보다는 단순한 방식이었지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명제이었기에 나이가 들면 죽게 될 때를 이야기하였고, 그때 결론은 기왕이면 함께 죽으면 좋겠다는 식이었습니다.
아내는 “그래, 내가 4년 손해 보지만 그 정도는 봐주지 뭐”라며 인심좋은 듯 이야기했었지요.
세월이 흘러 부부의 사별에 대해 여러 차례 토론 아닌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부부관련 강의를 했을 때 ‘부부는 서로 의존하지 말고 의지하라. 부부는 서로 의지할지언정 의존하지 말라’라고 했었지요.
부부가 서로 등을 대고 의지할 수는 있어도, 나의 등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기대고 의존하게 되면 상대방이 피하거나 없으면 완전히 넘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의존한다’라고 한 것이지요.
많은 잉꼬부부들 중 한쪽이 사망하면 다른 쪽이 시름시름 앓거나 무기력하게 삶을 산다고 합니다. 이것을 ‘반쪽을 너무 사랑했었기 때문’이라고 높게 평가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기 보다는 ‘너무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 진정한 사랑이라면 한쪽이 설령 사망했더라도 남은 자는 스스로 굳게 서서 죽은 자의 몫까지 더해서 꿋꿋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른 심리를 가진 부부들의 태도라는 것이었지요.
또한 인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란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요.
인생이란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이라고 합니다. 즉 지금 이 세상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종료가 될 터인데, 그러면 그 무엇이 있을까?
이 세상의 1막이 종료되면 다른 곳에서 2막이 올려질 것이란 것. 1막장인 인생이란 이 땅에서 우리 가운데 천국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인생이 종료된 이후 2막장에서는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
그래서 언젠가 인생의 무대에서 영생의 무대로 바뀔 수 있으므로 사는 날까지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지요.
또한 심리학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대해서도 토론한 적이 있었습니다.
스위스 출신의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임종 연구 분야의 개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가 말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5단계를 거쳐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으로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하지요.
이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미 죽음에 대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좀더 빨리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란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았던 적이 있었지요.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제 마음에 송창식님의 목소리가 반복되었을 때, 차라리 내가 죽고 당신이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마음도 많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죽음에 대한 가정에서, 둘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죽는다면 그건 ‘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사망하면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해 재산관리, 연금 등 생활자금, 보험수령방법 등을 아내에게 세세하게 설명해주곤 했었지요.
또한 ‘두 사람 중 먼저 죽는 사람과 나중에 죽는 사람, 둘 중 누가 더 나을까?’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우리 둘 다 ‘먼저 죽는 사람이 더 낫다’ 라고도 했었지요.
아무리 홀로 설 수 있는 심리를 가졌더라도 아픈 것은 사실. 그 아픔을 참아내는 것은 물론 모든 것을 정리하는 몫을 떠 안게 되었으니 굳이 선택하라면 먼저 죽는 자가 더 편하지 아니한가란 이야기. 솔직히 그 몫은 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앞의 이야기들이 부질없는 것이 아님은 우리가 죽음을 대할 때 죽음의 공포에 휘둘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수용할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한점 부끄러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인생이 마치는 날, 새로운 무대에서 이어가기에 흥미롭고 평안하게 이 땅과의 이별을 할 수 있는 것.
아내와 잠시 헤어져야 했던 그 날, 그렇게 이 노래가 무한 반복 되었던 것은 죽음에 대해 인식해왔던 것을, 아내는 이제 완수하였다는 것과, 나에겐 여전히 큰 숙제라는 것을 알려 주는 알람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4. 정리 및 소감
분명 젊은 시절 송창식님의 노래를 좋아했고 대중 가요 중 송창식님의 노래를 가장 많이 외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애송하던 노래가 아닌 노래들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이때 떠 오르는 것, 그런 노래를 불러주어 이렇게 힘을 준 송창식님이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비단 노래 뿐만 아니라 나의 무의식이든 전의식이든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젊은 날의 수 많은 기억들이 현재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는 것, 아내에 대한 기억들과 함께 또 이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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