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신념과 믿음과 관련된 글입니다. 지난 글은 ‘믿음의 다른 이름 신실함‘이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믿음은 이렇게 자란다:
야곱의 삶으로 본 신념의 믿음으로 전환
야곱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그의 이름보다 먼저 그가 살아낸 내면의 긴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단순히 이삭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손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붙들려 살다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법을 배워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인물들을 종종 ‘믿음의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믿음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갈등과 실패, 고집과 두려움 속에서 조금씩 자라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특히 ‘신념’과 ‘믿음’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 인물들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열쇠가 됩니다. 신념은 내가 붙잡는 확신입니다. 경험과 감정, 판단을 통해 형성된 자기 해석의 구조이지요. 반면 믿음은 하나님께 붙들리는 은혜입니다. 내가 만든 틀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인도하심에 나를 열어가는 선물의 자리입니다.
야곱의 삶은 이 두 구조가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함께 자라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1) 붙잡는 자의 시작: 신념으로 형성된 야곱의 내면
야곱은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들로 나가 사냥을 즐기던 형 에서와 달리 집 안에 머물며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5장에 따르면,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어머니 리브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어머니에게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들려주었던 말씀이었지만, 야곱에게는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운명’처럼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형보다 더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내면의 확신, 곧 신념을 품고 자라났습니다.
그는 형보다 뛰어나야 했고, 장자의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기다림과 계산이었습니다. 형이 배고파할 때 팥죽을 내밀며 장자의 권리를 샀었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 모든 행동은 신념에 기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 축복은 신념과 불안이 뒤섞인 복잡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그는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자가 되었고, 그때의 나이는 77세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젊은 야망가가 아니라, 평생을 신념 속에서 살아온 노년의 사내였습니다.
(2) 씨앗이 심기다: 벧엘에서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
야곱은 도망자의 길에 올랐습니다. 장자의 축복은 그를 떠나게 만들었고, 그가 향한 곳은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이었습니다. 그 여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집을 떠났고, 처음으로 홀로 밤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돌을 베개 삼아 잠들었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그 위를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자들, 그리고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그 약속은 야곱의 신념을 무너뜨리기보다, 그 신념의 밭에 믿음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심는 사건이었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계산하고,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의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그는 돌을 세우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원합니다.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 서원은 완전한 믿음의 고백이라기보다, 신념과 믿음이 섞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밤 이후 야곱의 내면에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3) 훈련의 시간: 신념이 점차 무너져 가고 믿음이 자라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는 장자의 축복을 가지고 왔지만, 그 축복은 현실 속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라헬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지만, 결혼식 날 밤, 그는 레아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는 속았고, 다시 7년을 봉사해야 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가정의 갈등, 아내들 사이의 경쟁, 자녀를 낳는 긴장과 생존의 무게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야곱은 여전히 계산하고 움직였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도망나올 때 벧엘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그의 마음에 다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삶의 무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신념과 믿음이 혼재된 시기였습니다. 그는 축복을 누리기보다, 그 축복을 견디고 감당할 수 있는 내면을 갖추는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믿음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4) 씨름과 이름: 얍복강에서의 대면과 정체성의 전환
야곱은 하란의 라반을 떠나 그의 가족들과 가축을 몰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그 길 끝에는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고, 야곱은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수많은 가축과 선물을 준비했고, 사람들을 앞세워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전략 뒤에는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 홀로 남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고, 야곱은 한 사람과 밤새 씨름을 벌입니다.
그 씨름은 단순한 육체적 싸움이 아니라, 야곱의 내면과 하나님 사이의 깊은 씨름이었습니다. 그는 붙들었고, 놓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겼지만, 그 승리는 자기 확신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5) 다시 벧엘로: 흔들림 속에서 다시 붙들린 믿음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뒤, 형 에서와의 재회를 통해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의 마음은 견고하지 못했고, 삶의 방향은 여전히 흐릿했습니다.
그는 형과 떨어져 있기 위해 세겜 근처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몰살했고, 야곱은 주변 민족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의 내면은 다시 두려움과 불안의 신념 구조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라헬의 죽음, 장남 르우벤의 빌하와의 동침 사건까지 겹치며 야곱의 삶은 더욱 복잡하고 거칠어졌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 축복을 누리는 삶은커녕 혼란과 상실 속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셨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도망자의 신분으로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처음 만났던 자리로 다시 부르심으로써, 야곱의 믿음을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야곱은 가족에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그는 제단을 쌓고, 가족과 함께 우상을 제거하며 믿음을 다시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벧엘에서의 제단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야곱이 신념의 흔들림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정돈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고, 삶의 문제들은 계속 이어졌지만, 그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께 붙들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믿음은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다시 붙들리는 반복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여정 속에서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고 계셨습니다.

(6) 나그네의 고백: 요셉과의 재회, 삶의 마지막 믿음의 언어
야곱의 삶은 고난과 흔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장자의 축복을 붙잡고 도망쳤고, 라반의 집에서 신념이 무너지는 시간을 겪었으며,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믿음의 정체성을 새롭게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고, 삶은 복잡하고 거칠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마지막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요셉의 생존 소식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오랜 세월 잃었다고 믿었던 아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야곱의 내면을 뒤흔들었고, 그는 애굽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길목에서,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곳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이며, 야곱에게도 믿음의 유산이 흐르는 장소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환상 중에 야곱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며 너를 반드시 다시 이끌어 올리리라.”
이 말씀은 야곱에게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재확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계산이나 두려움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애굽으로 향하게 됩니다.
요셉과의 재회는 야곱에게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껴안으며 말합니다. “이제 내가 죽어도 좋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았으니…”
그리고 바로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 고백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붙들린 나그네의 걸음으로 해석했습니다. 나그네란 목적 없이 떠도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걸어가는 자입니다.
야곱은 축복을 붙잡으려 했던 사람에서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마침내 축복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그의 마지막 걸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요청은 단순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야곱의 삶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고백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붙들린 나그네였고, 그 걸음은 믿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7) 부족한 야곱을 믿음의 반열로: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의 결론
야곱은 매우 공고한 신념으로 형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들으며 자랐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야곱에게는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운명’처럼 각인되었습니다.
그는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내면의 확신, 곧 신념을 품고 살아갔습니다. 그 신념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자기 해석의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그 신념은 현실 속에서 반복적으로 무너졌습니다. 형의 분노 앞에서, 라반의 속임수 앞에서, 가정의 갈등과 자녀 경쟁 속에서, 그리고 얍복강의 씨름 앞에서— 야곱은 자신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경험했습니다.
그 고통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신념과 믿음이 혼재된 내면의 충돌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계산했고, 여전히 붙잡으려 했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지점에서 야곱을 붙드셨습니다. 그의 완전함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붙들림을 보신 것입니다. 야곱은 쓰러졌고 흔들렸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단을 쌓았고, 우상을 제거했으며,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축복을 조작하려 했지만, 결국 하나님께 붙들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신념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신념의 밭에 믿음의 씨앗을 심으셨고, 삶의 사건들을 통해 그 씨앗이 자라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누리기보다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마침내 축복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그의 마지막 고백—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붙들린 나그네의 걸음으로 해석한 믿음의 언어였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신념이 믿음으로 전환되어 가는 우리 모두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여정 속에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흔들리는 걸음 하나하나를 통해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