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념과 믿음에 대한 글 ‘통증으로 인해 생긴 신념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에 이어 네 번째 글로서 믿음의 조상 여호수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역시 특수한 신념이 있었으며 평생의 과정에서 이를 믿음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믿음의 선진으로서 본받을 만한 위인인 것이지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호수아, 두려움 속에서 자라난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를 떠올릴 때마다 저는 그의 외형보다 그가 걸어온 내면의 여정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단순히 가나안 정복을 이끈 군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수백 년간 노예처럼 살아온 민족의 심리적 유산을 짊어진 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 애굽으로 건너와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잘 지냈지만, 애굽의 정권이 바뀌면서부터 오랜 시간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기간이 거의 400년이었으니, 몇 세대에 걸쳐 그런 삶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지역에서 공동체와 가정을 이루고 살았기에 완전한 노예는 아니었지만,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야만 했기에 복종에 익숙해졌고, 점차 자율보다는 지시에 따르는 방식으로 굳어졌습니다. 생존하는 것, 먹는 것, 편한 것, 고통스럽지 않은 것들을 우선적으로 찾는 습성에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깊은 생각을 스스로 하고, 무엇이 더 인간다운 것인지,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호수아 역시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막연하게나마 구원의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소망이 남들보다 더 강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부모가 그런 신앙을 남들보다 더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념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그렇게 무서운 대상인 애굽 왕에 굴하지 않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해내는 모습을 여호수아는 눈으로 보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그때까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막연한 대상이었지만, 그 순간부터 전지전능한 분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두렵고 떨리는 존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하나님과 언제든지 함께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여호수아에게 모세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으로서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 모세가 여호수아를 알아보고 자신의 곁에 두었을 때, 그는 너무나 감사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세가 시키는 일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모세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십계명을 받기 위해 호렙산에 있었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지켜보았던 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모세가 매우 부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고, 자신은 그저 보조자일 뿐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믿음이 자라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념인지 믿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지만, 분명히 그의 내면은 변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모세가 있고, 지금까지의 모든 기적을 보았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가. 그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설득할 방법은 없었고, 그저 모세의 지시를 따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세워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을까, 수많은 백성을 이끌 수 있을까. 그 마음은 떨림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40년 동안 보고 듣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은연중에 자리잡았던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라는 복종심리가 건드려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셨습니다. 거짓이 없고, 잔꾀를 부리지 않는 사람. 하지만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자율적인 판단에는 확신이 없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맞춤형 말씀을 주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준 말씀을 지켜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새로운 믿음의 초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며 말씀하시겠다는 약속이었고, 여호수아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말씀을 붙들고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무너뜨렸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너무나 손쉽게 승리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아이성 차례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세한 전쟁 방식을 말씀해 주셨지만, 아이성 때에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기에 스스로 행하면 될 줄 알았고, 작은 성이었기에 당연히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패배했습니다.
그는 다시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나아간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여전히 두려웠기에 회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리고 전쟁의 결과에 들떠 있었고, 자신들의 힘으로 이긴 것 같은 심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 전쟁에 진 이유를 들었을 때,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여리고 전쟁 중에 물건을 탐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아직 미흡함을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 전쟁의 패배가 공동체의 문제였음을 깨달았고, 아간의 죄를 통해 공동체의 정결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브온 족속과의 조약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속이며 조약을 맺었고, 그로 인해 진멸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연합군이 몰려왔을 때, 그는 또다시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고, 그는 그 사실에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까지 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달라졌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강하고 담대해서 두렵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행하시기에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끈 것이, 자신이 지혜롭고 통솔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놓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통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거목으로 자라났습니다.
그가 자신의 땅을 가장 마지막에 요청한 것도, 자신이 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통해 받은 것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리더로서의 덕목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공동체 전체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안정을 누리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고, 자신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땅을 받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방식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 질서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늙어 죽음이 가까웠을 때,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도달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념과 믿음이 혼재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온전히 믿음으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했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것은 단순한 결심이나 마인드 셋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이며,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체득해야 알 수 있다는 것을.
특히 그의 마지막 고백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은 단지 과거의 위대한 인물의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도 가장 지혜롭고 복된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