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42: 시 쿠키

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42번째 글, 시 ‘쿠키’입니다. 이애경님은 이 시에서 쿠키를 어떠한 마음으로 만들었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내면의 이야기를 잘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쿠키

이애경의 쿠키

 

쿠키를 구웠다
생일 맞은 가족을 위해
집에 오실 식구들을 위해

쿠키를 불에 넣을 때마다
섭섭한 마음을 태우고
불편한 마음을 태우고
수줍은 마음을 태운다

용서의 쿠키로
위로의 쿠키로
소망의 쿠키로 구워서
마음 담은 사랑의 쿠키를
밤새 구워 담아야겠다.

 

 

오래 전 누군가를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미워했었지요.

오래오래 미워하는 동안 나는 지쳐 갔고, 작은 미움들은 하루하루 모여 불꽃같이 타올라 분노의 화산을 만들어 갔지요.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아니 용서하려 할수록 미움들은 더 커져만 갔답니다.

나는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흐르는 세월 따라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지요.

어느 날 뒤돌아보니 미움은 나의 주인이 되어 결코 돌아오지 않을 나의 시간들을 삼켜 버렸네요.

과거의 사건에 매여있었던 나의 신화를 깨뜨리기로 작정한 날. 

마침내 나는 나를 용서하였고 나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해방의 날이 되었답니다. 그 마음을 ‘쿠키’로 구워 보았지요.

긴 겨울 보내고 새롭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꽃들과 새싹의 소리를 보는 평화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애경님의 시 ‘쿠키’란 제목을 보았을 때 매우 반가웠습니다.

이애경님이 오랜 동안 저를 위해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가끔 수제 쿠키나 케이크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나긴 하는데, 마치 제빵사와 같이 거의 매일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약 5년 전 즈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당뇨가 생겨 음식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애경님이 그때부터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저를 위해 초코렛, 보리, 통밀 등을 재료로 해서 설탕 대신 다른 감미료로 쿠키와 빵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번뜩이는 수가 생겨 이를 적용해 보고 성공한 경우에는 저에게 그것을 자랑스레 설명하곤 했는데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었지요.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군요.

그렇게 나날이 장족의 발전을 하여 만든 쿠키들. 누가 오는 날이거나 시댁이나 누구를 만나러 가는 날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어서 방문하는 손님에게, 시부모님 등 친척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잘 포장해서 선물로 주곤 했는데, 아낌없이 퍼주는 그 모습에 때론 제가 너털웃음이 나오곤 했었습니다. 제가 참 흉내내기 어려운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쿠키’란 제목을 봤을 때에 이애경님이 그러한 추억을 담아 시로 썼으리란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를 막상 보니 제 예상이 벗어났고, 특히 글을 보니 제 기억과 글의 내용이 서로 연결되지 않아 참 많이 당황했습니다.

저를 위해 밝은 모습으로 쿠키를 만들어 자랑 아닌 자랑을 했던 그 모습은 그녀의 심리적 앞면의 모습이라면,  글에서 나오는 이애경님의 심리 모습은 그녀의 그림자와 같은 심리적 뒷면의 모습과 같아 보였습니다.

시를 보면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습니다.

쿠키를 불에 넣을 때마다
섭섭한 마음을 태우고
불편한 마음을 태우고
부끄런 마음을 태운다

이 장면을 보면, ‘카타르시스’, 마음을 정화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섭섭했는지, 무엇이 불편했는지, 무엇이 부끄러웠는지 알 수 없으나, 감추었던 그 마음을 꺼내어  쿠키를 오븐에 넣을 때 그 마음도  함께 넣어 태웠으니 이러한 행위가 어쩌면 이애경님에겐 마치 종교의식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생각되는군요.

그와 같은 자신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쿠키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용서의 쿠키로
위로의 쿠키로
소망의 쿠키로 구워서
마음 담은 사랑의 쿠키를
밤새 구워 담아야겠다.

위의 구절을 보니, 이애경님이 자신의 쿠키를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베푼 이유를 알 듯 하네요.

누군가에겐, 이 쿠키를 드시고 용서의 마음을 가지시길

누군가에겐, 이 쿠키를 드시고 힘든 마음에 위로가 있으시길

누군가에겐, 이 쿠키를 드시고 갈피 못 찾은 마음에 소망이 생기시길

그러한 자신의 사랑의 마음을 담아 주면서 그렇게 기원했겠지요.

 

그런데 글을 이어서 읽어보니 제 마음이 섬뜩하면서도 참 아려왔습니다. 글 내용을 보니 이애경님이 모질게 미워하였고 결코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는 그런 대상이 있었다는 것과 착하고 여린 이애경님이 그런 모진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전의 글에서 용서란 단어를 처음 언급했을 때, 용서의 대상이 타인인지 자신인지 분명치 않아 제 마음에 긴장감이 올라왔었는데, 이번 글을 보니 이애경님은 다음과 같이 그 대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에 매여있었던 나의 신화를 깨뜨리기로 작정한 날. 

마침내 나는 나를 용서하였고 나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해방의 날이 되었답니다.

이를 보면, 이애경님의 미움의 대상이자 용서의 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애경님은 왜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했을까요?

이애경님이 자신을 미워하면서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꼈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잘못은 법률을 대동해서 그 잘못 여하를 따질 수 있는 그런 내용은 절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인간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많은 경우, 자신의 윤리, 양심, 신앙 등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잣대에 모자랄 때 인간은 자책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잣대이자 기준이기에 타인의 눈엔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행위가 그 기준과 차이가 나면 날수록 그 자책감은 더 커질 것이고, 그것이 죄책감으로 바뀔 경우, 자신이 밉고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일종의 왜곡된 감정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감정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잘못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들로 인해 자신이 자신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한 부분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잘못이나 부족함을 저지르거나 방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함으로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 발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죄책감은 ‘내가 잘못했어, 나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야’와 같은 느낌이 마치 무한루프 같이 재생되게 하며 그렇게 해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애경님의 모든 과거를 다시 검색해서 이애경님이 그런 죄책감에 빠질 수 있는 사건을 찾아볼 때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죽음에 점차 가까워져 갔던 엄마에게 자신이 아무 도움이 못되었다는 무력감이었습니다. 이러한 무력감은 자신의 기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죄책감으로 쉽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애경님의 마음 속에 이러한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오랜 기간 자리 잡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심리공부를 한 이후에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했겠지만 그녀의 정서가 아직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애경님은 쿠키를 구울 때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작업을 했던 것이지요. 또한 더불어 자신이 힘들게 만든 쿠키를 타인에게 선물하고 그들이 건강하고 맛있게 먹음으로 그 마음이 위로되었을 뿐만 아니라 엄마에게 잘 하지 못했다고 느낌으로 생긴 자책감을 조금씩 덜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 속의 기준을 좀 더 채울 수 있도록 하는데도 일조를 하였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이 잘못한 사람에게 잘함으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끝내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이러할 때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심리 속에 빠져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책감의 심리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 중엔 타인을 잘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비록 그 대상은 이제 떠나갔지만 다른 이들을 대신 섬김으로서 자신의 내면의 기준을 채울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은 더 성숙해지고 더 발전합니다.

이애경님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이며 이를 ‘쿠키’란 시로 표현한 것이지요.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