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36: 시 김치

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36번째 선물, 시 ‘김치’입니다. 우리가 거의 매일같이 먹는 김치, 혹시 김치를 찬양하는 시일까요? 이애경님의 시 ‘김치’를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김치

이애경의 김치

 

이제 막 뽑아온 배추를 보고
통 크게도 열두 포기나 샀다

속 찬 배추 다듬고
하룻밤 소금에 절이고 나니
김치 절반은 한 것 같다

쪽파 껍질 한올 한올 벗기니
내 마음 굳은 살도 벗겨진다.
하이얀 속살 내비치는
쪽파 따라
나도 속 내 그대로
내비치고 싶네

갖은 양념 버무려
빨간 저고리 배추에 입히고
초록치마 한자락 둘러주니
새색시 빨개진 두 볼
수줍어 어쩔 줄 모르네

알록달록 조화 속에
묵묵히 삭아 갈 김치
내 마음도 삭아가겠지

 

김치

 

어제는 시장에 잠시 들렀더니 봄나물이며 봄에 담글 수 있는 김치 재료들이 맘껏 폼을 내고 있어 김치재료를 사서 봄 김치를 담구었습니다.

오늘은 전에 써 두었던 시를 올리며 그 때 마음을 다시 읽어봅니다.

나의 내면의 마음과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힘들어 했던 속내를 담아 보았습니다.

오늘도 봄 햇살만큼.. 볼에 스치는 봄바람만큼 따스한 말로 나에게 또 그대에게 건네며 한 주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애경님의 시와 글 ‘김치’를 읽으니 많은 감회가 생겨났습니다.

30여 년 전 김치를 한 번도 담아보지 않았던 사람이 이젠 김치 베테랑이 되었었지요.

글의 내용을 보니 김치를 담글 때 이전에 썼던 시가 생각나 그 시를 다시 읽어보면서 그때 느꼈던 자신의 감회를 간략하게 표현했더군요.

시를 썼던 시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로 추측되었습니다.

12개의 배추 포기를 한꺼번에 산 것을 보니 김장하려고 했나 봅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아예 절인 배추를 샀거나 밭농사를 크게 했던 동네 지인에게 배추와 함께 아예 김장을 부탁했었습니다. 공부방을 함께 하면서 김장 김치를 따로 담그는 것은 너무 무리라고 생각해서 제가 별도로 그분들께 부탁했었지요.

오늘 이 글을 먼저 읽은 후 이애경님이 담궜던 김치, 그러니까 햇수로 2년 전 겨울에 담았던 김치 중 김치 통 한 개가 김치냉장고에 고이 있음을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작년 여름 경엔 오이김치와 열무김치를 별도로 담가 먹었었고 김장김치는 이전에 다니던 교회 교우들 중 두 분이 세 통을 담가 주었었지요. 그 김치들을 이제 거의 다 먹어가는데 그래서인지 이애경님의 마지막 작품인 김장 김치 한 통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먼저 든 생각은 ’12포기 배추를 어떻게 집에 가지고 왔지? 나에게 부탁했었나? 나도 12포기를 한꺼번에 가져오기는 불가능할텐데. 김장하려면 무우도 사고 쪽파도 사고 해야 하는데… 혹시 배달시켰나? 아, 그때 거래하던 마트에서는 배달을 잘 해줬는데… 그럼 다행이고…’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더군요.

또한 둘째 셋째 단락을 읽을 때에도 ‘배추 절이고 할 때 내가 도와주지 않았나? 쪽파 까는 것을 내가 도와주지 않았나? 내가 전문이었는데….’

그 다음 단락에는 제 마음도 할 말이 없어졌나 봅니다. 사실 배추에 양념 버무리는 것은 제가 도와준 기억이 별로 없거든요. 그건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으니까요. 물론 김치 통에 다 담으면 그것들을 원하는 장소로 옮겨주는 것은 제 몫이었지요.

이와 같이 자꾸만 내 마음이 달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이애경님께 미안해져서 그런 것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제가 김치를 워낙 좋아하기에 ‘김치! 하면 밥에 싸 먹는 등 맛있게 먹고 배부르라고 한 것인데, 이애경님은 이런 마음으로 만들었구나’. 저는 그런 마음을 전혀 못 느꼈고 몰라주었기에 이제야 그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 미안해 아예 회피하고 싶어 그런 생각이 자꾸 든 것입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이유를 대라면 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그때 나는 일하느라고 바빴으니까…”

그런데 ‘이애경님이 이제 나를 떠나 다시는 함께 하지 못한다’란 현실 앞에서 그런 이유나 논리가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군요. 이런 걸 ‘후회’라고 부르나 봅니다.

이 시를 다시 읽어보니, 이 시는 이애경님이 심리공부를 한 후 쓴 시가 확실히 아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심리시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이론이 그 시 내용의 베이스가 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에, 심리 지식이 있으면 시 내용을 이해하기 좀 더 용이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심리 공부 이전의 시들은 이애경님 자신도 자신의 심리가 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 진짜 이유를 모른 채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기에 그 시의 깊이를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오랜 시간 이후 이애경님이 그 이유를 글로 달아주었기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애경님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와 자신의 무의식적 부분을 다음과 같이 해설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내면의 마음과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힘들어 했던 속내를 담아 보았습니다.

위의 문장은 이애경님이 ‘달팽이’란 시를 설명할 때도 말했던 내용인데요, 심리공부를 한 후 쓴 시 달팽이는 자신의 내면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심리적 측면에서 구조화시켜 썼다면, 위 시는 그런 측면보다는 오직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고 싶어 쓴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애경님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쪽파 껍질 한올 한올 벗기니
내 마음 굳은 살도 벗겨진다.
하이얀 속살 내비치는
쪽파 따라
나도 속 내 그대로
내비치고 싶네

쪽파를 벗기는 과정에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뭔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답답함을 그대로 내비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녀의 ‘의식의 영역’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비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무의식의 영역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애경님이 이 당시에 자신의 무의식을 정확히 이해했었다면 한결 빠르게 자신의 심리적 어려움을 털어버릴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눈길이 간 표현은,

갖은 양념 버무려
빨간 저고리 배추에 입히고
초록치마 한자락 둘러주니
새색시 빨개진 두 볼
수줍어 어쩔 줄 모르네

였습니다. 이 시구를 보니 마치 젊은 시절의 이애경님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네요. 김치를 의인화했는데 의인화 모델을 자신도 모르게 ‘젊은 이애경’으로 한 것 같군요. 젊은 이애경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아 참 마음이 애틋했습니다.

이 시에선, 아직은 설 익은 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맛을 내듯이, 이애경님 자신도 더욱 성숙해지길 그녀의 무의식도 기대했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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