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23번째 선물, 시 ‘의자’입니다. 산 밑의 정자에 있는 어느 의자를 말하는데요, 이애경님은 이 의자를 통해 무엇을 느꼈고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의자
초록물 오르는 산자락, 정자
담담한 세월의 흐름 한가운데
“고단한 영혼 쉬어가라”
풍파에 낡은 의자, 여전히
내어놓았네강점(强占)과 분단의 역사 속
하염없는 설움에도
당신의 따스한 눈빛, 의지삼아
“손을 씻었노라
마음 청결히 하였노라”
속삭이신다바람 따라 잠시 머문 한 점,
나 또한 먼 훗날,
다시 쉬어갈 그대 영혼 위해
풍파에 낡은 의자,
여전히 내어놓겠네
어느 날 산자락 중턱 즈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면서 어디 쉴 곳이 없을까 찾는 중에 뜻밖에도 너무나 반가운 정자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힘을 내어 정자에 올라가니 진분으로 덮힌 오래된 의자가 양 쪽으로 있었고 그 위에 푯말이 있어 물끄러미 보게 되었는데 무언가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어느 예배당의 해묵은 의자였습니다. 이제는 이미 낡아 볼품없는 의자였지만 순간 나라의 슬픈 역사를 맞이한 그 때로 되돌아가 잠시 머물며…
묵묵히 견디어 낸 민족의 숭고한 눈물과 기도가 이제는 골분(骨粉)이 되어 의자 위에 고스란히 내려앉은 듯 그 의미를 되새기며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민족 안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무의식의 상처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을 통해 미래를 향한 오늘의 내 마음까지 다시 추스르며 산 아래로 내려오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72주년 광복을 맞이하며…
이애경님의 시 ‘의자’를 여러 차례 읽어보았습니다.
자그마하고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 내면에 웅비함이 넘치는 시의 표현, 매우 깊이 있는 시의 내용에 ‘아, 이분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란 생각과 함께 이 시의 깊이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시를 살펴보면, 등장인물은 ‘정자’, ‘의자’ ‘나’가 됩니다. 그런데 이 시를 깊이 보니 이 시는 이애경님이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의 첫째 연에서 ‘고단한 영혼 쉬어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누가했을까 보니 ‘정자’가 한 말로 보입니다. 내가 더운 여름날 지쳐있을 때 오래된 정자를 보았을 때 그 정자가 이와 같이 말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시적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을 좀 아는 제가 볼 때에 그녀에게 진짜로 이러한 소리가 들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녀는 꿈이나 기도를 할 때 어떤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듣곤 하는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애경님에게 ‘고단한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를 돌이켜 보면 오직 한 분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애경님이 믿는 ‘하나님’이지요. 그녀는 이에 대해 아래의 글을 통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글을 보면 그 의자는 일제 강점기에 어느 예배당에서 사용된 의자라고 했습니다. 푯말에 그 사연이 적혀 있었겠지요. 요즘도 교회에서는 긴 의자를 사용하는 곳에 많은데 그 의자는 현대식은 아니지만 길게 만들어진 나무 의자였을 것입니다. 그 예배당 의자가 이젠 정자에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고단한 영혼 쉬어가라’라는 음성이 자신의 귀에 울렸을 때, 이애경님은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그 의자를 자신에게 제공한 것과 그 음성을 들려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라는 느낌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연의 첫 이야기에서 ‘강점(强占)과 분단의 역사 속 하염없는 설움에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애경님은 그 의자에 앉아 있었을 때, 그 의자가 살아온 기간이 매우 오래되었고 매우 고생한 흔적이 많았기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중에 많은 탄압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한 당시의 사람들이 연상된 듯합니다.
이애경님은 그러한 탄압이 있었음에도 ‘손을 씻었노라 마음 청결히 하였노라’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듯 합니다. 여기에서 ‘손을 씻었노라 마음 청결히 하였노라’란 그러한 탄압 등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을 모두 씻어 내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원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그녀가 정자에 앉아 있었을 때, 깊은 초록과 그늘,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모든 시름을 털어줌으로 마음이 시원해져, 종전의 모든 힘듦을 잊고 새 힘을 받아 활력을 찾은 것과 유사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음성은 이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자 은혜가 주어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렇게 잠시 머물렀던 그 곳에서 이애경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나름 깨달은 것 같습니다.
‘먼 훗날, 다시 쉬어갈 그대 영혼 위해 풍파에 낡은 의자, 여전히 내어놓겠네’
‘지금 내가 이렇게 고단한 상태에서 쉬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언젠가 고단한 상태에서 힘들어 하는 영혼이 있다면 그를 위해 자신도 정자의 의자와 같은 존재가 되겠다’란 것이지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아래에 있는 글에 다음과 같이 표현해 놓았네요.
‘묵묵히 견디어 낸 민족의 숭고한 눈물과 기도가 이제는 골분(骨粉)이 되어 의자 위에 고스란히 내려앉은 듯’.
즉 누군가의 눈물과 기도가 이제는 뼈가루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눈물과 기도를 뿌렸던 그 누군가는 이제 죽어서 마치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하니 자신도 최소한 무언가를 조건없이 내 놓아야겠다는 마음을 깊게 가지게 된 것이지요.
또한 이애경님은 글 말미에 ‘민족 안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무의식의 상처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을 위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미래를 향한 오늘의 내 마음까지 다시 추스르며’라고 표현했지요.
이애경님 우리 민족이 일제 강점기를 통해 생긴 무의식의 상처를 치유해야 함을 말한 것이며 ‘미래를 향한 오늘의 자신의 내 마음까지 다시 추스린다’고 했으니 이러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자신도 일조를 해야겠다는 단단한 결심을 한 것이지요.
실제 그녀는 상처받은 내담자들에게 자신의 힘이 진하도록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내면에 있는 아픈 상처들을 치유하는데 최선을 다했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은 ‘민족 안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무의식‘이란 표현을 했습니다. 이때의 무의식은 그 당시에 당했던 개인들의 내면에 무의식화된 ‘개인 무의식’은 물론 우리 민족 대부분의 사람 속에 무의식화된 ‘집단 무의식’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무의식들이 자손들에게 다시 전수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의식들 중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경직되게 하고 편가르게 하며, 본질보다는 형식에 매이게 하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도 아무 문제없다는 것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 시를 모두 읽고 또한 이애경님의 시를 정리하고 나니, 제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간 그 정자에 저도 함께 갔을 가능성이 높은데, 누구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았는데 어느 누구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있었겠지요.
이젠 제가 이애경님이 남긴 시 ‘의자’를 읽으며 그녀의 뜻을 기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