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열여섯번째 선물, ‘가족안 진정한 자유’입니다. 가족안에 진정한 자유가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애경님은 가정안에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가족 안 진정한 자유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말들로 나를 담아내고 있나요?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였네요. 무수히 쏟아 내는 말들로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지요. 가족이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고 권위를 앞세워 지시하거나 명령하기도 하고 거침없이 판단하거나 비판하며 폭력까지 합세하여 행사하는 무수한 말의 홍수 속에 사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어쩌면 주체할 수 없는 억압된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 이를 뱉어낼 출구를 찾아 헤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 내가 타인에게 하는 말,
내가 공동체나 사회에 하는 말들을 생각해보면서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해요.
무엇보다 가족 안에서 나의 말이 순기능적으로 잘 전달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 자신의 타고난 자질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되는데,
가족치료사인 버지니아 사티어는 이 자질에 접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자유’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 과거에 있었으며 앞으로 있거나 있어야만 하는 것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는 자유
- 생각해야만 하는 것보다 생각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자유
- 느껴야만 하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자유
- 허락을 받으려고 기다리지 않고 알고 싶은 것을 물어 보는 자유
- 안전을 택하며 항상 조심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자유
(Vergina Satir, Making Contact, 1976)
가족은 서로 다른 자질과 기질을 갖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갈등과 의견의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거나 평가하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느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 알고 싶은 것을 마음껏 물어 볼 수 있는 자유, 안전과 순종만을 강요하는 것보다 자기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마음껏 펼쳐질 때 보다 유연한 가족이 되어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유의 경험을 맘껏 누릴 수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자아존중감과 통합을 이루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어 건강한 나로 성장하고 나와 나, 나와 타인, 나와 사회가 자유롭게 만나고 자유로운 소통의 언어를 담아내는 건강한 집, 건강한 사회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이애경님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도입부에서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마르틴 하이데거의 명언을 인용하였네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 명언을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즉 언어를 통해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가 깃들어 있는 공간인 “집”이 될 수 있다’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애경님의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애경님이 남긴 글들도 모두 그녀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애경님의 언어에는 그녀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등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즉 이애경님의 언어는 이애경님의 자아를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나란 존재’라고 정의할 때에 결국 언어와 존재의 관계는 좀 더 명확해 질 것입니다. 그런 언어가 쌓이고 쌓인다면 언어의 공간이 이루어질 것이고 또한 이는 자아의 공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존재의 공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하기에 ‘인간은 비록 언젠가 사망할지라도 글 등으로 남겨진 언어로 인해 그 사람의 자아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또한 그 존재는 그가 어떤 언어를 남겼는지에 따라 그의 존재성을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언어가 폭력적이라면 그의 자아는 폭력적인 존재로서 남을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은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통해 사티어의 ‘가족안 진정한 자유’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다섯 가지의 전제를 언급했지요.
이애경님은 사티어를 인용해 가족간 순기능적 소통을 위해선 자질이 필요하며 그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다섯 까지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다섯 가지의 자유를 갖추지 못했다면 순기능적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섯가지 자유를 갖추지 못하는 원인들이 무엇일까?’란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티어가 제시한 다섯 가지와 연결해서 아래와 같이 적어보았습니다.
(1) 나는 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할까?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무언가에 의해 불안감이 높거나 가정에서 지나치게 자신에게 높은 것을 요구하는 등도 될 것입니다. 그 밖에 개인에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2) 나는 왜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못할까?
아마도 가정에서 획일적인 사고 방식이나 전통적 관념을 강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에 따라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자유로운 사고가 제한될 수 있겠지요.
(3) 나는 왜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할까?
아마도 가정 내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나, 감정 표현을 억제해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장과정에서 애정결핍 등이 있었다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감정을 정지시키려 하거나 왜곡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나는 왜 하고 싶은 질문을 하지 못할까?
아마도 집안 분위기가 권위적이라면 질문을 쉽게 하지 못하거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비난받는 분위기가 있다면 아예 질문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5) 나는 왜 나 자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까?
만약 가정 내에서 과잉보호가 이루어지거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 구성원들이 새로운 도전이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꺼릴 수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메시지가 반복되면 개인의 성장과 자율성이 제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애경님의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던 내용은,
나는 물론 나의 자녀들은 위의 다섯 가지 중 무엇을 하지 못하는지 먼저 찾아보고, 우리 가정 자체가 그러한 환경인지, 또한 그 원인이 과연 무엇인지를 찾아 보아야겠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 우리 가정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는 것이었지요..
더불어, 사티어의 다섯 가지 자유는 곧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과 직결되어 있으며, 다섯 가지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존재의 집은 ‘위기의 집’이 될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이애경님이 우리 자녀들에게 이러한 자유들을 주려고 무던히 노력했었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