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15: 시 그림

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열다섯번째 선물인 시, ‘그림’입니다. 우리는 붓이나 펜 등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는 우리가 의도한 무언가가 들어있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이 말하는 그림은 일반적인 그림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과연 이애경님의 그림은 무엇을 말할까요? 마주해 보시면 어떨까요?

이애경과 그림

이애경의 그림

 

초롱초롱 눈물망울은
낯선 이방인이 되어
하염없이 나를
바라봅니다

의식 너머
들리는 소리에
이끌려 따라가는
나의 몸짓은
몸의 언어로만
볼 수 있는 당신의 소리를
느낌으로 그려봅니다

그 속에 분노로 가득했던
당신의 언어는
바로 나의 언어였음을
이제야
알아차립니다

당신의 「무의식」은 안전한가요? 

등하불명(燈下不明),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오히려 알아내기 어렵다는 말로 남의 일은 잘 알 수 있으나 자기의 일은 자기가 잘 모른다는 뜻을 되새겨봅니다.

의식적으로 무언가 강하게 조명하면 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더 짙어지게 되는데요, 어느 날 ‘나는 옳고 선하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선함 아래에 짙게 드리워져,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약점과 나의 결점을 볼 수 없었던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던 저를 발견하고 힘들어 했던 마음을 시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란 나의 어두운 면으로, 의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의식할 기회조차 상실되고 미분화된 채로 그늘에 가려져 원시적인 마음으로 고통스럽게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네요.

다행히 그림자의 존재를 조금씩 알아차려짐으로 무언가 ‘불편하고, 싫어서 밀어냈던’ 상대방에게 나의 그림자가 투사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러한 나의 모습을 수용함으로 나는 나의 감정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나의 또 다른 이면인 무의식 속 그림자들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하나씩 이해하고 소화시켜 나갈 때, 우리의 의식의 지평도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므로 인격의 전체로 통합해가고 나아가 불편한 관계와 다툼은 서서히 종식되어가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애경님의 시와 글을 마주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이애경님이 자신의 내면을 심미안적으로 깊이 바라보고 있는 장면들과 그 내면 속에 숨어 있는 페르조나와 그림자의 양면의 모습을, 특히 고통 속에 힘들어 하는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자신이 왜 그렇게 힘들어 했는지를 알아차리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는 평소에 칼 융의 심리이론을 좋아했던 이애경님이 칼 융의 ‘의식, 무의식, 페르조나, 그림자’란 심리이론을 차용하여 이 시와 글을 썼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애경님이 시와 글로 남긴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글을 살펴보면, 등하불명이란 단어를 썼습니다. 등잔밑이 어둡다라는 뜻인데요, 그러면서 이애경님은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예를 들었습니다. 즉 ”나는 옳고 선하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선함 아래에 짙게 드리워진다’라고 설명했지요.

이는 자신의 페르조나와 그림자와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자신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타인에게 책잡히지 않고 더욱 옳고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고백한 것이지요.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가면, 즉 자신의 페르조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페르조나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밑에 숨겨져 있던 그림자 역시 짙어진다고 또한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페르조나가 ‘옳고 선한 것’이라면 자신의 그림자는 ‘악한 것’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또한 이애경님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약점과 나의 결점을 볼 수 없었던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던 저를 발견하고 힘들어 했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페르조나 즉 나의 옳음과 선함이 강해질수록, 그림자 즉 나의 약점과 결점 투성이들이 보이지 않아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기에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는 것이지요.

위의 시는 이러한 이애경님의 내면의 상태를 전제로 해서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젠 시를 살펴보면,

‘초롱초롱 눈물망울은 낯선 이방인이 되어 하염없이 나를 바라봅니다’

이 시의 초롱초롱 눈물망울이란 자신의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지요. 그녀는 페르조나와 대비해서 그림자를 악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그림자는 슬픔이 많은 그림자이며 그 슬픔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통으로 버무려져 있으며 자신의 내면 깊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나 그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낯선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그림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표현했는데요, 이는 이애경님의 그림자가 이애경님에게 ‘자신 좀 제발 알아줘’라고 호소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애경님은 인생을 살아갈 때에 자신이 뭔가 자꾸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몰라 매우 힘들어 하고 있었음과 대비되는 장면이기도 하지요.

 

의식 너머 들리는 소리에 이끌려 따라가는 나의 몸짓은 몸의 언어로만 볼 수 있는 당신의 소리를 느낌으로 그려봅니다’

이제 이애경님은 자신의 그림자를 추적하였고 점차 그 그림자의 정체를 발견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인간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영역에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의식 속에서 자꾸 어떤 소리들을 질러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이 자신의 그림자의 소리를 표현하는 방법은 자신의 몸의 언어로만 알아낼 수 있으며 그러하기에 몸의 언어인 자신의 몸짓으로 그림자의 소리를 그림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처절한 ‘자기 과정’을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 분노로 가득했던 당신의 언어는 바로 나의 언어였음을 이제야 알아차립니다’

그림자의 소리를 자신의 몸짓으로 그려보니 그 소리엔 분노가 가득차 있음을 발견한 것이지요. 이애경님은 자신의 내면에 분노가 가득차 있었고 이것이 자신의 그림자의 소리였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평소에 자신은 ‘옳고 선하다’란 페르조나로 무장되어 있었고 이렇게 무장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내면의 실체 중의 하나인 그림자는 ‘분노’의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 얼마나 내면엔 양가적 감정들로 휩싸여 있었을 것이며 또한 이것들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나는 선하고 옳은 사람으로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데 내면 밑에서 자꾸 분노가 올라오고 있었으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아마도 미칠 정도로 혼란스러웠겠지요.

 

이 시는 이와 같이 자신의 그림자를 비로소 마주하고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내적 분노가 자신의 그림자의 소리였음을 발견함과, 자신의 그림자가 ‘날 좀 알아줘’라며 슬픔의 눈물망울을 한 자신의 어린 자기임을 이해하고 이제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 글과 시는 자신의 자유롭지 못했던 자아, 너무 올곧으려 했던 페르조나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분노의 소리를 질렀던 자신의 그림자를 모두 발견한 것이지요.

그림자는 왜 그렇게 분노의 소리를 질러댔을까요? 아마도 먼저 그림자를 발견하여 이를 포용하고 올곧으려 했다면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할 방법을 몰랐기에 페르조나로 자신을 포장하려 했던 것이지요. 착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숙명적인 모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와 글은 칼 융의 이론으로 표현하면, ‘무의식의 의식화’를 수행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러한 무의식들을 이제 끄집어 내어 눈에 보이도록 함으로서 이젠 이러한 나를 스스로 포용할 수 있었고 더욱 ‘자유스러운 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보고 이애경님을 다시 돌이켜보니, 언젠가부터 점점 더 ‘자유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거북하고 힘들어했던 그녀가 언젠가부터 이를 좀더 편하게 수용하는가 하면, 술이라면 먹어선 안 되는 것처럼 대했던 그녀가 고기가 나오면 한 두잔 정도 받아 마시는 모습,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에서 편하게 웃기도 하며, 심지어는 몸개그나 말로 가족들을 웃길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변모했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이 시와 글에서 발견할 수 있겠군요. 페르조나와 그림자가 모두 의식화됨으로 현재의 자기와 통합화됨으로 더욱 풍성한 자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칼 융은 ‘자기 실현(self-realization)’이라고 했지요.

그녀는 이 땅에서는 자기를 찾아간 사람이며 신앙적으로는 하늘나라란 빛나는 여름을 찾아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애경님은 그런 사람이었네요.

 

이애경의 밤의 벗꽃

 

“이애경의 선물15: 시 그림”에 대한 2개의 생각

  1. 핑백: 이애경의 선물17: 시 바다 우린 차

  2. 핑백: 이애경의 선물18: 자기 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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