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의 열네번째 선물, 시 ‘봄비의 향연’입니다. 봄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 무언가가 새록새록 건드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애경님은 무엇이 건드려졌길래 ‘봄비의 향연’이라고 했을까요?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봄비의 향연
대지로 내려오는
봄비의 향연 속에한 영혼의
메마른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함께 담아낸다죽음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첫 기억들은가슴으로 들어야만
들리는 애도의
시간을 거쳐무의식으로 소통하는
처절한 결핍의 사슬을
하나 하나 풀어낸다삶의 애환을 푸는
언어 예술은
새 생명의 환희로
겸허히 피어오른다
어제 봄비가 좀 내려서인지 오늘 햇살은 더욱 맑게 우리를 비추는 것 같아 마음까지 더욱 청결해지는 느낌을 받는 햇살 좋은 아침입니다.
하늘이 주는 양식을 먹고 산과 들 그리고 길가의 나무들이 더욱 푸르러지는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자연을 통해 깨우쳐 가는 공부가 진짜 공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계절…
가슴 속에 묻어 두었지만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삶의 애환…
비 되어 함께 슬픔 울어 내고 지지하며, 거울되어 담아 낼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와 대화를 풀어 나갈 때 치유가 일어나고 있음을 봄비의 향연에 빗대어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동네길 걷다가 비온 뒤 더욱 선명해진 튤립을 보며 한참을 생각에 젖어보았습니다.
자연의 경청을 통해 또는 소중한 만남을 통해 하나씩 애도의 시간을 거쳐 풀어져 나가는 향연이 그대에게도 펼쳐지면 좋겠습니다.
이애경님의 ‘봄비의 향연’을 먼저 읽어 보았습니다.
시인들의 시 중에 봄비가 들어가는 시가 참 많지요. 봄비는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힘이 있어 보입니다.
이애경님의 시 첫 구절에서 ‘대지로 내려오는 봄비의 향연 속에’라고 표현했기에, 저는 봄비가 대잔치를 벌리듯 기분좋게 쏟아지는 장면이 연상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애경님이 이 시를 쓸 때에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거나 봄비로 인해 봄의 정취를 듬뿍 받아 감성이 무르익었을지 모르겠단 느낌이었지요.
실제 이애경님과 저는 비가 내리는 날 우산 하나를 쓰고, 일부러 비를 맞으며 꽃들과 푸른 나무가 거리를 수 놓은 길을 곧 잘 걷곤 했기에 이것이 아마 내 마음에 연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데 시를 계속 보니 봄비가 내리거나 자연의 싱그러움을 드러내는 내용은 온데간데없고 ‘한 영혼의 메마른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함께 담아낸다’라는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시 아래의 글을 읽어보니 이애경님의 어느 친구가 찾아왔기에 그 친구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며 친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과거에 친했던 동창들이 몇 십년만에 먼 소식 끝에 찾아왔었기에 저도 몇 차례 인사드린 적이 있었지요. 대개 친구들은 자신의 말못할 사연을 들어줄 사람을 찾았나 보더군요.
그런데 시 내용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이러한 처절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의 치유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네요.
‘죽음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첫 기억’ → ‘가슴으로 들어야만 들리는 애도의 시간’ → ‘무의식으로 소통하는 처절한 결핍의 사슬을 하나 하나 풀어낸다’
마음의 치유 첫 과정은 ‘죽음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첫 기억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실제로 내담자 중에는 자신의 기억을 해리시켜 아예 기억 속에 없는 듯 할 수도 있으며, 기억이 나긴 나지만 그 기억을 꺼내는 것이 고통스러워 일부러 회피에 회피를 거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도 친구도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될 수 있는데 치유를 위해선 이러한 아픈 기억을 끄집어 내어야 하지요.
그런데 무조건 끄집어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끄집어 내기만 한다면 오히려 악화만 시킬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래서 이애경님은 ‘가슴으로 들어야만 들리는 애도의 시간’을 가져주었던 것이지요. 친구의 상황을 공감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함께 울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함께 울어주었을 때 친구는 아직까지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아픈 감정들을 꺼내 놓고 자신도 애도하면서 감정의 정화과정을 거치고 함께 울어주는 친구를 통해 위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등을 이야기로 꺼냈을 것입니다. 이때 이애경님은 ‘무의식으로 소통하는 처절한 결핍의 사슬’을 발견한 것이지요. 친구는 무언가를 행동했을 때 무슨 이유가 있어서 행동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어’와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진짜 이유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행한 진짜 이유를 모른 채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그렇게 행동했다면 그것은 ‘무의식에 의해 행동한 것’이 되며, 그런 행동의 진짜 이유는 자신의 결핍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그러한 결핍과 결핍이 연결된 복잡한 심리 속에서 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이애경님은 그 친구의 얽히고 설킨 무의식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심리상담이란 이와 같이 내담자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생긴 무의식 속의 정서와 생각과 행동을 의식화하여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친구는 그냥 들어주어선 될 일이 아니었기에 평소에 친구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이애경님은 자신의 심력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그 결과, ‘삶의 애환을 푸는 언어 예술은 새 생명의 환희로 겸허히 피어오른다’라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친구가 자신의 심리적 원인과 치유방식을 단 시간내에 알아차린 듯합니다. 이애경님은 그녀와의 심리상담을 ‘삶의 애환을 푸는 언어 예술’이라고 표현하였고 심리상담의 결실을 ‘새 생명의 환희로 겸허히 피어오른다’라고 표현하였네요.
이 시와 글을 여기까지 살펴 보니, 그녀가 시의 제목을 ‘봄비의 향연’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날 비가 온 이유도 있지만 ‘새 생명의 환희‘를 이와 같이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일종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이애경님 자신도 그날 기분이 매우 좋았음을 ‘향연’이란 단어 속에 포함시켜 놓은 것이지요. 이애경님이 매우 행복함을 느낀 시간이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