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이들이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심리적 문제에 빠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글 앞에 있는 ‘선악과가 뭐길래‘란 글과 연결된 내용이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 창세기 3장 10절 말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개역개정)
The man answered, “I was naked, and when I heard you walking through the garden, I was frightened and hid!” (CEV)
성경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처음 생긴 현상은 눈이 밝아졌으며,
눈이 밝아짐으로 인해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무화과 나무 가지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으며,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닐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숨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악과를 먹었는지에 대해 질문했을 때, 아담은 하나님과 하와를 탓하는 이야기를, 하와는 뱀을 탓하는 이야기를 했지요.
이전에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한 그 결과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란 하나님 말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간의 역사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꼽으라면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 즉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는 신화적인 이야기일 수 있고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이미 엎질러진 과거지사가 되기에 다시 들추어내기 피곤할 수 있는 이 사건.
게 중엔 어떤 분들은 “나,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데?”라며 이젠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여전히 깊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 사건이 인간에게 준 데미지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고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어떤 식이든 그 데미지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한 말씀은 결코 빈말도 엄포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 말은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으니 내가 너희를 죽이겠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너희가 스스로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가 더 강할 것입니다.
선악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는 앞에서 나름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에서는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으나 실제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만약 선악과에 독이 있었다면 독이 퍼져 생물학적으로 사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그 당시에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었지요. 그 후로 무려 900년 이상 더 살았다고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너희는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일종의 저주에 가까운 말 같으나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인간의 운명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도 영원히 산다면 그것이 오히려 끔찍한 형벌과도 같을 수 있다는.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도 인간은 이미 한계가 존재했었습니다.
인간은 전지전능 하라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기에 인간의 생각과 느낌, 행동은 부족함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한계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치명타가 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옆에 계셨고, 그 분을 잘 알고 의지한다면
그 분의 전지전능함의 혜택을 언제나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선악과와 관련된 두 가지 심리적 문제
그런데 그것이 크게 뒤틀어졌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그 결과, 바로 예측불가의 ‘심리적 문제’에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단순화한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전지전능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오류와 편견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란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함으로 그 말씀의 본질을 놓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진 것이지요.
본질을 놓치는 오류가 반복된다면 그 오류가 맞다는 편견이 생기고 더 나아가 고정관념이 생기지요.
결국 본질을 벗어난 거짓이 진실로 굳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이때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거짓을 합리화시킵니다.
신앙적 측면에서만 볼 때도 인간은 지속적으로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신은 죽었다, 신은 없다,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으며, 누구는 하나님 말씀을 자의적 해석을 하여 잘못된 신앙적 신념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둘째, 인간은 심리적 문제에 빠질 수 있다.
심리적 문제란 인간이 ‘잘못된 생각’과 ‘왜곡된 감정’에 휩싸여 ‘정상적이지 못한 행동’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앞의 내용 중 인간에게 편견이 존재할 때 그 편견을 바로 잡아 주거나 새로운 것을 알려 주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여 편견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매우 낮아집니다.
심리적 문제에 빠지게 되면 사람들은 귀와 눈이 닫혀 그 내용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며,
어떤 사람은 고집불통이 되어 안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게 됩니다.
부부상담 중에 자주 목격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부부 두 사람이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는 이유는 서로의 문제를 해소하고 다시 잘 살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궁극적 목적은 다시 행복하게 살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 속에 앙심이 숨겨져 있고 다른 사람은 서운함이 숨겨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마음에 앙심이 있는지 서운함이 있는지를 모릅니다.
제3자가 이성적으로 보면 두 사람이 서로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것이 쉽지 않으며 실제 그렇게 되는 기간이 의외로 길게 소요됩니다.
쉽게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앙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서운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마음이 완전히 해소되기까지 길고 긴 투쟁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런 마음이 있어 화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3. 심리학자 Kalher의 생활자세와 심리적 문제와의 관계
심리학자 Kalher는 인간의 심리적 생활자세를 크게
건강한 생활자세, 우울한 생활자세, 편집증적 생활자세, 무용한 생활자세로 나누었습니다.
● 우울한 생활자세란 ‘I’m Not OK, You are OK’란 심리적 모드를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경우 자신이 못났거나 자신이 나쁘다고 자기자신을 찔러 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자기탓’하는 심리적 자세입니다.
● 편집증적 생활자세는 ‘I’m OK, You are Not OK’에 해당됩니다.
나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는 식이지요. 한 마디로 ‘남탓’하는 심리적 자세입니다.
● 무용한 생활자세란 ‘I’m Not OK, You are Not OK’에 해당됩니다.
이 경우 타인이 자신을, 자신 또한 타인을 모두 배척하는 심리로서 매우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 ‘자기탓 남탓’을 동시에 하는 심리적 자세입니다.
결국 이러한 심리적 생활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바로 ‘심리적 문제’에 빠져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자기상자’에 스스로 갇혀 버려서 그 곳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자기 신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4. 아담과 하와의 심리적 문제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의 반응을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벗은 줄 알고 나뭇잎으로 가리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를 감정과 연결해서 보면, 갑자기 마음 속에 ‘내가 벗고 있구나’하면서 수치심이 마음 속에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그 이전에는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감정입니다.
수치심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
이 감정은 자신이 부끄러워할 만한 무언가를 했거나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타인 등 외부에서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감정이 복합화되어 있으며,
특히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으로 인한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 있는 경우,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그 수준을 올리려 하기 보다는 자기를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 급급한 감정입니다.
이때 타인이나 자신에게 분노를 느낄 수 있으며 그 분노의 화살이 타인이나 자신에게 쏘아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감정이 심해지는 경우 자기존재가 상실되는 감정을 느낄 수 있기에, 이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행동이나 심리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 감정에 싸여 ‘자신들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것을 마음에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런 감정 속에 빠진 채 두려워 자기보호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기에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선과 악을 정확히 구분한 것이 아니라 수치심에 싸여 무엇을 잘못하기는 했지만 정확히 무엇을 잘못한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오히려 수치심에 빠져 타인의 시선만을 의식한 채 그 시선이 두려워서 자기보호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와 같은 상태가 된 것을 ‘그들이 심리적 문제에 빠졌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심리적 문제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먼저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했을 것입니다.
감정으로는 부끄러움을 정확히 느끼고 생각으론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 잘못된 것이다’라는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했을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그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면,
아담은
- ‘I’m OK, You aren’t OK’에 해당되는 편집증적 생활자세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는 하나님에게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가 주므로 먹었습니다’라고 합니다.
- 그 말의 뉘양스를 보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과 여자를 탓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하와는
- ‘I’m Not OK, You aren’t OK’의 무용한 생활자세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미 아담에게 버림받았으며 자신도 자신이나 타인을 옹호할 마음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 이 때의 그녀는 완전히 세상에 고립된 느낌, 그러하기에 매우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심리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군요.
그들의 상태는 달랐으나 그들은 어떤 상태이든 간에 자신의 눈과 귀를 모두 닫아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므로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는 해산하는 고통과 남자를 섬김을, 아담에게는 일을 할 때 힘들게 수고해야 함의 고통을, 그리고 둘다 흙에서 태어났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함을 선언하십니다. 일종의 저주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한 대목에는 인간이 심리적 문제를 겪으며 휘둘림을 당해야 한다는 형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주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불순종의 죄를 범한 결과,
수치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게 되므로
심리적 문제를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
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정리 및 소감
저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죽음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육체적 죽음. 영적 죽음, 심리적 죽음입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며,
영적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심리적 죽음은 아담과 하와와 같이 심리적 문제를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하나님의 저주와도 같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거둬들이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며, 영적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리적 죽음입니다.
심리적 문제는 최초는 죄로 인해 발생했지만 실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죄로 인해 심리적 문제에 휩싸인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심리적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심리적 문제는 결국 기독교인들이 ‘말씀과 생활’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중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여전히 편견에 잘 사로잡히기도 하며, 자신의 심리적 문제와 결합될 때에는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들으려 하지도 보려 하지도 않거나, 또한 그걸 듣거나 볼 내적 힘이 없게 됩니다.
또한 어떤 이는 오히려 자신의 고집에 사로잡혀 이를 배척하려고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즉 말씀과 생활은 전혀 일치하지 못하고 겉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 중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하기에, 저와 여러분 모두 신앙과 심리가 조화를 이루며 좀 더 정직하고 힘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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