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복음 4장에는 우물가 여인으로 잘 알려진 수가성의 한 여인을 예수께서 만나는 내용으로 유명합니다.
예수님과 한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 그 만남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공생애 첫 예루살렘과 우물가 여인의 만남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습니다.
그 때 관계를 맺은 사람들, 예를 들어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빌립, 나다니엘 등이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은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당신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하니 무슨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질문했었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 그리하면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을 당시 어느 밤에 니고데모란 사람이 예수님을 은밀히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셨지요.
그 이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인근지역인 유대지방에 갔으며 그때 제자들은 세례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 역시 애논이란 곳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님과 예수는 흥해야겠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지요.
사람들이 세례요한보다 예수께 더 많이 찾아오자 그 소문을 바리새인들까지 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삶의 터인 갈릴리지방으로 돌아갑니다. 바리새인들과 의미없이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지요.
당시 이스라엘 요단강 서쪽 지역을 단순하게 삼등분하면
북쪽 갈릴리지방, 중간지역 사마리아, 남쪽 예루살렘 및 유대지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만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솔로몬왕이 사망한 이후 아들 르호보함이 왕이 되었을 때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졌던 시절,
북이스라엘의 수도가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먼저 멸망 당하였고
남유다는 바빌론에게 멸망 당하였지요.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할 때 북이스라엘의 상당수는 남유다로 망명을 합니다. 같은 민족이었기에 가능했지요.
또한 앗시리아왕은 사마리아 지역의 상당수의 사람들을 포로로서 앗시리아로 데려갔습니다.
또한 타국지역의 외국인들을 사마리아에 이주시켜 사마리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들과 함께 살게 합니다.
그들을 서로 혼혈화함으로 민족 자체를 말살하는 무서운 정책이었지요.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갔던 남유다 사람들과 후예들은 70년 이후에 세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정책이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온 힘을 다하지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건축에 참여하기를 원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사람들은 이를 거절합니다. 이들은 혼혈화된 사마리아사람들을 이방인이자 이교도와 같이 취급한 것이지요. 실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방 종교와 혼합된 종교로 변질된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수용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 이후 사마리아지역 사람들은 남 유대지역 사람들과 북쪽의 갈릴리지방 사람들에게 배척받게 됩니다. 어찌보면 슬픈 역사가 이어진 것이지요.
그 당시 갈릴리지방 사람들이 예루살렘이나 유대지방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지나가기 보다는 다른 경로로 우회하여 다녔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갈릴리로 돌아 갈 때 이 지역을 관통하는 경로를 택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반대하거나 우려를 표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결정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물가 여인과의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유대지역에서 사마리아의 수가성까지는 거리가 대략 120km가 나온다고 합니다. 한 시간에 4km의 속도로 걷는 것으로 계산하면 30시간 걸립니다.
하루에 10시간쯤 걷는다고 가정하면 3일쯤 걸리는 셈이지요.
예수님은 수가성의 우물가에 도착했을 때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수가성에 있는 우물가 곁에 털썩 주저 앉으신 것 같습니다.
이 우물은 옛날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파 놓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때의 시각은 성경에 6시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학자에 따라서 6시를 정오인 낮 12시로 해석하기도 하며 오후 6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6시를 유대인의 시간으로 보고 현재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낮12시가 되며,
6시를 로마의 시각으로 보면 현재와 동일하게 오후 6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6시가 당시 유대인의 시간으로 보고 현재로 환산해서 그 시간이 정오라고 보고 있으며, 그것과 연결해서 우물가의 여인이 동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더운 시간대인 정오에 우물가로 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오후 6시로 보는 학자들은,
- 그 당시가 로마의 통치를 받았던 점,
- 요한복음이 로마의 공식언어인 헬라어로 작성된 점,
- 요한복음이 작성된 시점(AD 80~90년 사이로 추정)이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AD 70년)되어 디아스포라가 진행되었던 점,
- 요한복음이 이스라엘이 아닌 에베소란 타국지역에서 작성된 점,
- 또한 이 책의 독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라고 볼 때에
이를 위해선 사도 요한이 로마의 시간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예수님이 매우 지쳐 있었던 것도 하루 종일 강행군했기에 그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당시의 식사는 하루에 두끼가 보편적이었습니다.
첫째 식사는 요즘식으로 브런치같이 오전 중에 간단하게 먹었으며, 둘째 식사는 저녁시간에 만찬으로 먹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요즘식으로 여행기피지역이었기에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매우 낯설었을 것입니다.
식사를 사서 먹고 야영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2. 우물가 여인과의 첫 번째 대화
이제부터는 예수님과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대화에서 먼저 흥미로운 것은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께 마실 물을 주었을지 여부입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라는 말이 예수님을 면박하는 말인지,
아니면 정말 이상해서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질문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이 여인의 특성을 살펴보면,
- 낯선 남자를 회피하지 않고 말을 참 잘한다는 점,
- 자신이 궁금한 것은 적극적으로 질문했다는 점,
-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주님(sir)이라고 높였다는 점,
- 예수님이 말한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일관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생수를 달라고 한 점
등을 살펴볼 때 그녀의 성향은 외향(E)과 정서(F) 성향이 높은 사람으로 ‘사교적인’ 기질성향을 타고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기질성향을 타고난 사람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말을 잘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분위기 메이커일 가능성이 높지요.
만약 사고(T)성향이 높아서 기질성향이 섬세하거나 주도적인 사람이었다면 이와 같은 대화가 진행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낯선 사람을 좀 더 경계했을 것이며, 예수님의 생수를 준다는 말에 반론을 재기했을 것이며,
자신이 이해되지 않으면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쉽게 예수님을 ‘주님(Sir)’으로 받아들이며 상대방에게 호응해 주었습니다.
성향 자체가 타인을 배려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지요.
이를 바탕으로 보면,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께 물을 주면서 정말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유대인인 당신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가”란 질문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여인이 예수께 연속적인 질문을 하고 또한 물을 기르러 올 필요가 없도록 생수를 달라고 한 것은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라포(rapport)가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포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심리상담 등에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서로 친밀감과 신뢰감이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본격적인 상담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3. 우물가 여인과의 두 번째 대화
다음 대화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대화는, 보는 각도에 따라 예수께서 무례한 질문을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미 알면서도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녀의 아픈 곳을 사정 없이 찔러대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라포가 형성된 가운데
그녀의 상황을 공감하면서도 직면시키기 위해 하신 말씀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심리상담기법으로 표현하면 ‘공감적 직면’이라고 부릅니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이를 외면해서는 그녀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그것을 직면시킨 것이지요.
이 우물가의 여인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한 남자와 사귀고 있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정확히 구별해서 이야기한 것은 그녀의 다섯 명의 남편은 정식으로 결혼했던 법정부부였으며
그 부부관계가 종료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또한 현재 사귀고 있는 사람은 차후 법률적 결혼대상자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다섯 번이나 결혼한 여성입니다. 흔히 이 여성을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다섯 번이나 결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들 중에는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녀가 그녀의 남편들에게 버림받은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남자가 여자와 살기 싫어 이혼증서를 작성하고 이혼하면 부부관계가 종료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때 이혼은 철저하게 남성이 제기하는 것이지 여자가 제기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습니다.또한 이와 같이 5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부부관계를 종료했음에도 현재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다양한 측면에서 결핍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결핍이 경제적 측면일 수도, 심리적 측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 입장에서는 그 결핍들을 채우는 수단이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결핍을 채우려는 결혼이 그녀에게 새로운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로 인해 그녀의 내면엔 상처들로 인한 고통이 내면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결혼이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심리가 깊어지면 질수록 그 마음의 구멍이 점점 커지게 되며, 그녀의 내면엔 공허와 허무,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력하고 무익하다는 심리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면의 갈증이 매우 심한 상태란 뜻이지요.
내면의 갈증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사람은 자신의 경험 중에 그나마 그 갈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던 방법을 다시 적용하려 합니다.
그러한 것에 매달릴수록 인간에게 중독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며 그 중독은 더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지요.
그녀에겐 그것이 ‘남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수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자신도 알아차릴 수 없는 자신의 내적 갈증을 혹시 해소할 수도 있겠다란 직감이 발동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직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삶 속에서 형성된 그녀의 심리적 고통, 내적 갈증.
이를 해소하려는 그녀의 결혼이란 방식이
그녀를 더욱 심리적, 신앙적 미궁에 빠지게 하였음을 알아차리신 것이지요.
4. 우물가 여인과의 세 번째 대화
그 다음의 대화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내용은 보면, 우물가 여인은 자신의 문제를 바로 알아차린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깁니다.
그리고 예배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요.
이 부분을 볼 때 여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더 이상 말하기 싫어서 말을 바꾼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문제와 관련해서 연상(직관)작용이 일어났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평소에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혹시 예배 드리면 좀 나아질까,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려움을 돌아보실까란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는 예배를 특정장소에 가서 드려야 했으며, 그 예배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당시의 예배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으며, 전통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드렸던 장소는 그리심산의 성전이었지요.
그리심산은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할 때 축복의 땅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 재건축을 하려할 때 함께 참여하려 했던 사마리아인들이 이를 거부당하자 그리심산에 별도로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했었지요. 하지만 BC 107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를 직면시키자 바로 평소의 궁금증인 예배 드리는 것이 연상되었고 이를 질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궁금한 내용을 정확히 설명하여 주십니다.
예배의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도 그리심산도 아니라는 것.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
그러한 예배를 드리는 시기는 곧 이때라는 것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고 있다는 것
이때 ‘영’과 ‘진리’는 헬라어 성경에는 각각 ‘프뉴마’와 ‘알레시아’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프뉴마’는 ‘영’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킵니다.
‘알레시아’는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과 진리’는
‘하나님의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진리’로서
이는 예배가 하나님의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
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
5. 우물가 여인과의 네 번째 대화
이때 여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대화의 내용을 보면 우물가 여인은 영적으로 빠르게 알아차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다.
앞의 내용에서 예수께서 말한 진리의 대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여인에게 자신이 영과 진리 중 진리에 해당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차리게 하는 역할을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인지와 그의 말씀을 알아차렸다는 것은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 속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예배의 요건을 만족시킨 것이지요.
영이신 성령 하나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녀는 성부 하나님을 찾아가 만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인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물 양동이를 놓아둔 채 마을로 가서 이를 전하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녀는 자신의 약점을 사람들에게 공개함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립니다. 그 당시의 그녀의 능력으로선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며 진심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이와 같이 이야기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나옵니다.
사람들이 즉시 반응을 한 것은 평소에 이 여인과 소통이 잘 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평소에 소통을 거부했다면, 사람들은 그 여인의 부정적인 모습이 연상되었을 것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부정적으로 보고 거절하였거나 뜸 들였을 것입니다.
6. 우물가 여인의 예배
그렇다면 그녀에게서 예배란 무엇일까요?
그녀에게서 예배란 예수께서 처음 말씀하신 생수를 마시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생수를 마심으로 그녀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며, 예수님 말씀처럼 다시는 그러한 갈증으로 힘들어 하지 않게 됨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그녀의 삶은 변화하였을 것입니다.
설령 여섯 번째 남자와 헤어지거나 결혼하여 살 지라도 자신의 내적 갈증에 허덕이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관통한 이유는,
내면의 갈증 속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는 한 여성이 거기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며,
동족에게 버림받았던 사마리아인들도 자신의 구원의 대상이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7. 정리 및 소감
제가 우물가의 여인을 살펴본 이유는 저도 우물가의 여인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내와 사별한 후 제 마음에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이 점차 커져 가는 과정에 있었을 때, 제 마음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자고 했었으며,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위로를 받았으며 새 힘을 얻었지요.
또한 제가 다니는 내포사랑의교회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우물가의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 말씀의 의미를 더욱 새롭게 느끼게 된 것이지요.
예배는 성령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바탕으로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근본적인 결핍을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물가 여인의 처음 예배는 이와 같았으며, 그녀는 예배를 통해 점점 더 성장하였을 것이며, 우리 역시 우리의 예배를 통해 더욱 더 성장해 갈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귀한 나눔 감사합니다… 여인의 성향을 분석한 것이 너무 흥미로워요. 본문 속에서 상담기법을 발견한 것도요. 본문을 읽는데 필요한 그당시 사회적, 역사적, 지리적 배경도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저도 최근에 우물가의 여인처럼, 예수님 외에 다른 곳에서 자꾸 저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였는데, 오직 예수님께만 나의 마음의 갈급함을 채워야겠다고 다시 묵상하였습니다… 예배의 자리를 통해, 영과 진리로 예배함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생수를 더욱 깊이 들이키기를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글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차리신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고 나눔을 가지시는 방법은 현대심리상담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 방법은 교회에서도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되는 이유 중에는 신앙과 심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측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이 결핍이 있듯이 우리 각자에게도 결핍이 있으며 자신의 결핍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심리상담과 관련될 수 있으며, 이러한 심리를 회복하는 것은 심리상담기법을 통해서도 가능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 즉 예배를 통해 더욱 정직한 방식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더운 날씨인 것 같군요.
마음도 건강도 시원하게 잘 유지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명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