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창세기 3장과 관련된 두 번째 글입니다. 여기에 하와와 뱀과의 대화 직후, 선악과에 대한 하와의 감정 변화와 관련 매우 묘하고 의문스러운 문장이 나옵니다.
첫번째 글은 아담과 하와의 기질성향과 심리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었지요.
1. 창세기 3장 6절 상반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개역개정)
When the woman saw that the fruit of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pleasing to the eye, and also desirable for gaining wisdom.(NIV)
뱀의 이야기, 즉 너희가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신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에 하와가 선악과란 나무를 다시 쳐다볼 때 마음에 들어온 내용들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2. 하와가 느낀 감정과 그 의미
위의 성경 중 영어성경을 보면 하와가 느낀 감정과 관련된 단어들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세 단어를 보면 ‘good, please, desirable’입니다.
여기에서 good은 ‘좋네, 맛있겠어’라는 느낌을, please는 ‘참 이쁘게 생겼네’라는 느낌을, desirable은 ‘와! 기대되네’라는 느낌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감정을 잘 보면,
처음 ‘좋네 맛있겠어’는 미각으로서 가장 감각적이면서 원초적인 것이라면,
두번째 ‘참 이쁘게 생겼네’는 시각으로서 감각적이되 원초적인 것보다는 더 시각화됨으로 좀더 고차원화된 느낌이며,
마지막 ‘기대되네’는 감각이 동반되지 않은 느낌으로서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등과 같은 생각의 영역으로 확장되기 쉽습니다.
즉 하와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그 감정들이 원초적인 느낌에서 생각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녀의 변화하는 세 가지 느낌은 모두 기쁨이란 감정과 관련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느낌의 변화는 바로 욕망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처음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 뱀을 통해 듣게 됨으로 점차 구체화되고 커지면서 욕심의 단계를 넘어 탐욕의 단계로 넘어감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하와의 인지부조화와 방어기제
만약 하와가 처음부터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인지했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래? 선악과를 먹으면 내가 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 잘 되었네. 먹어야겠군’.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실제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선악과에 대해 하와의 느낌을 묘사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창세기 3장 6절의 문장은 인간심리에 대한 묘사로서 심리학에서 나오는 ‘인지부조화이론’ 및 방어기제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지부조화이론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개의 상반된 두 인지요소가 있습니다.
서로 상반된 내용이기에 부조화상태에 있는 것이지요. 서로 부조화상태에 있기에 심리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심리는 부조화상태를 줄여 조화상태로 만들기 위해 압력을 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와의 마음을 보면, 두 가지의 인지 요소가 있습니다.
- 이전부터 알고 있는 내용: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
- 새롭게 알게 된 내용: 선악과를 먹으면 죽기는커녕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그녀의 심리는 서로 다른 두 인지 요소 중에서 후자를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조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심리가 바로 선악과를 보니 ‘good → please → desirable’하다고 느낀 것이지요.
또한 이것을 정신분석 분야에서는 ‘(자기)합리화’란 방어기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포도’이야기에서 여우가 한 말 ‘저 포도는 틀림없이 너무 셔서 못 먹을 거야’가 좋은 사례이지요.
이러한 인지부조화이론은 우리 생활 중에 매우 많이 있습니다.
- 사이비종교를 믿던 사람들이 그 종교가 사이비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 종교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오히려 더 심화되는 이유
- 정치에서 자신이 추종하는 정당이 무언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 정당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과하게 옹호하는 행위
-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것
모두 인지부조화이론 및 합리화란 방어기제와 관련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와의 합리화 과정을 이와 같이 선악과를 볼 때 느끼는 감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어’를 포기하고 ‘나는 선악과를 먹고 싶어’를 따르고 싶을 때 ‘선악과는 먹기에 좋으며 보기도 좋으며 먹으면 현명해질 것 같아’란 느낌을 통해 ‘그래서 나는 선악과를 먹어도 괜찮아’라고 합리화를 시킨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선악과에 대한 하와의 감정
그렇다면 그녀가 선악과에 대해 가졌던 애초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것을 토대로 이를 추정하면 하와가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선악과에 대해 뱀에게 ‘신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신께서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녀는 뱀에게 말할 때 그것을 만져도 안 된다고 인지강화 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터부시 하므로 선악과 근처에 아예 가까이 가지 않음으로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방어막을 쳤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선악과를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과 관련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녀의 두려움은 ‘지금-여기’에서 느끼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과 관련됩니다.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은 진정한 감정의 두려움과 왜곡된 감정의 두려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감정의 두려움은 ‘지금 여기’ 주어진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왜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는지 분명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와 관련 짓는다면 전두엽이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는 감정인 두려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와가 이와 같이 두려움을 느꼈다면 절대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를 눈에 보듯이 이미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느낀 두려움은 왜곡된 감정의 두려움 중 ‘막연한 느낌의 두려움’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느낀 두려움이 아니라 만들어진 두려움이었지요.
이 경우 만들어진 두려움을 깨버린다면 쉽게 해체될 수 있습니다.
하와의 경우 선악과를 먹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가 된다고 느낀 것이지요.
둘째, 두려움과 반대되는 욕망이란 불이 마음에 지펴졌습니다. 훨씬 더 용이하게 자신의 막연한 느낌의 두려움이 해체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갈 줄 알면서도 현실적 큰 이익(욕망)에 사로잡혀서 죄를 자행하다가 결국 감옥에 가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정리 및 소감
뱀이 하와를 넘어뜨릴 수 있었던 것은 하와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 반면 하와는 자신의 심리를 오히려 뱀보다 더 몰랐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와는 이런 심리를 가져 쉽게 농락을 당했을까요?
이 질문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쉽게 죄와 타협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핵심적인 하나가 하와의 ‘막연한’ 것과 관련된다고 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정체성이 없다’가 될 것입니다.
이를 좀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막연하다 =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이 없다
하나님 말씀을 막연하게 안다 = 언제든지 말과 행동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의 심리를 잘 모른다 = 언제든지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억압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정하지 않았다 = 어느 순간 탐욕 등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정체성이 없어 ‘막연해질 때’ 쉽게 일어나는 현상들 중 일부분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오늘 내용 중 욕망, 탐욕과 관련, 좀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링크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욕구 욕심 탐욕 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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