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물병의 유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 개인이 눈물병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슬플 때 흐르는 눈물을 병에 받아 두었는데, 그 눈물병을 자신이 사망할 때 무덤에 함께 두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아버지이자 골리앗을 물맷돌로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다윗왕도 그의 생애동안 흐르는 눈물을 병에 받아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 동양이나 서양 모두 눈물병을 받아 둔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남자가 눈물을 받아 둔다는 것은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남자로 태어나면, 태어날 당시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오직 세 차례만 울어야 한다고 배웠었습니다. 또한 남자가 우는 것 자체가 거의 금기시 되었기에 눈물병으로 눈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생소하게 여겨졌지요.
더구나 눈물이 흐를 때 병을 자신의 눈에 대고 눈물을 받는다는 것이 다소 억지스럽다는 생각조차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앞에서 언급한 다윗왕 시대에 있었던 전쟁이야기를 생각하면 전율을 느끼곤 합니다.
전쟁터에서 적군과 아군 양쪽에서 소년장수들이 도열하여 상대방의 목에 칼을 대고 신호와 함께 목을 그어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편이 더 군대사기가 좋은가를 과시하는 행위였지요.
이러한 장면을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매우 잔인하고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자신의 자식들을 전장에 보내야만 했던 부모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조차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악착같이 오기로 버티며 강하게 살아남아야 했을까 싶더군요. 소위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은 그 시대 속 사람들.
그런 시대의 최고장수이자 왕인 다윗이 눈물을 흘린다?
물론 그 당시와 현재를 동등하게 비교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워낙 문화적 사회적 차이가 있기에 현대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해하기 힘든 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2. 눈물병의 의미
그렇다면 현대시각으로 바라볼 때 모순같이 여겨질 수 있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눈물병을 눈에 받쳐 가며 눈물을 받은 이유와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모든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주로 슬펐을 때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 용사조차도 눈물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눈물을 봐달라고 하는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가 없으면 울지 않더라도 엄마가 있으면 더 서럽게 우는 것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들이 서럽게 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울음이 그들이 믿는 신을 향한 하소연이자 탄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울음에 대한 대상이 분명히 있는 것이죠.
“내가 눈물을 흘리고 내 눈물을 눈물병에 받는 것을 바로 신께서 보실 것이다.
그리고 신은 나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 시원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죠.
그런데 그들의 눈물은 그저 카타르시스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쁠 때, 감동받을 때 등 다양한 이유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이 때의 눈물은 슬플 때 우는 것입니다.
3. 슬픔의 원감정과 눈물
슬프다!
슬픔이란 감정은 무엇일까요?
심리학에서는 슬픔의 원감정을 ‘상실감’이라고 합니다. 슬픔에 가득찬 이유는 바로 그 내면 속에는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상실감이 생기면 자신의 자아가 점점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자아가 점점 떨어지며 약해지게 되면 점차 우울하게 되고 그것이 아주 심해지면 자신을 죽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울어서 잠시 카타르시스가 오더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더 이상 카타르시스가 아니죠. 그러한 것이 반복되면 그 내면 속엔 한(恨)이 맺히게 되는데 한(恨)이란 일종의 분노이고 이 분노를 심리학에서는 상실분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상실분노가 심해지면 앞에서 말했듯이 자아가 약해지고 우울증에 걸리게 되는 것이죠.
우리 민족을 이전엔 한(恨)의 민족이라고도 했는데, 이 말은 바로 슬픔의 민족이라는 뜻이죠. 결코 좋은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은 바로 자아가 낮아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증상이 아주 심해지면 바로 자아가 거의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아가 완전히 상실된 사람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눈물의 대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상은 바로 그들의 신(God)이자 현대 카톨릭이나 개신교의 신과 동일한 분이시죠.
그들은 ‘그 분이 바로 자신을 보아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8가지 복이란 아주 유명한 말씀 중,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카타르시스의 애통이 아니라 바로 신을 향한 애통이라는 뜻입니다. 신께 매달리며 눈물을 흘리니 신께서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이가 눈물을 흘릴 때 부모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해주고 품에 안아 주면 아이의 자아는 건강해집니다. 바로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애착이란 말로 쓰기도 합니다.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 당하고 난 이후 뿔뿔히 전 세계로 흩어져 살다가 거의 2000년에 다시 이스라엘이란 국가로 환생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슬퍼도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신을 믿었기에 바로 그들의 자아가 살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단체나 국가도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자아가 살아 있으면 그 조직은 영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아가 죽어버리면 소멸해버리는 것이죠. 심리학적 접근에서 말입니다.
4. 정리 및 소감
신앙이 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눈물을 닦아 주고 위로해주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눈물을 흘려도 그 뒤엔 계속되는 상실감으로 인해 공허해지고 우울해진다면 그 옛날 다윗과 같이 자신의 눈물을 보아 줄 신의 위로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말씀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