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이 저에게 시인 신달자님의 ‘오래 말하는 사이’란 시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쓴 시인이 어떤 의미를 담아 썼는지 궁금하다고 하더군요.
신달자님의 시 중 몇 편을 글로 써본 적이 있었기에 반가운 마음이었지요.
시를 읽으면서 ‘아, 역시 신달자님 시답구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 글을 자주 들여다 보니,
이 시는 ‘사람간의 대화’ 속에서 해소되지 않는 불편함, 무언가 진짜 중요한 그 무엇이 빠져 있어 답답함을 넘어 매우 힘들어 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임은 분명한데, 이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잘 드러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교류분석이란 심리학을 만든 심리학자 에릭 번의 ‘교류’란 개념을 이 시에 가져와 살펴본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더군요.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달자님의 ‘오래 말하는 사이’
‘나’는 ‘너’와 깊은 왕래를 서로 말로 해왔다고 합니다. 즉 이 시는 너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너와 나의 왕래’ 이를 심리학에서는 ‘교류’라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에릭 번이 교류분석이란 심리학 분야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시의 내용과 같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교류를 하는 것에서 인간심리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찾아낸 것이지요.
교류란 영어로 Transactio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거래’가 됩니다. 이때의 ‘거래’란 심리적 거래를 의미하지요.
그러므로 너와 내가 서로 말로 깊은 왕래를 해왔다는 것은 서로 ‘심리적 거래’를 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인은 ‘왕래를 말로 해왔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언어’이지요. 하지만 실제 사람이 대화를 할 때는 ‘언어’만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 외에 ‘비언어’란 것을 많이 사용합니다. 비언어의 종류에는 ‘억양’, ‘제스처’, ‘억양’, ‘자세’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도 대화를 할 때 사용되었음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류’를 에릭 번은 ‘상호간의 자극과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언어와 비언어로 자극을 하면, 너는 언어와 비언어로 나에게 반응하며 이러한 자극과 반응이 계속 이어지므로 대화가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문장은 시인이 ‘너’라는 사람과 어쩌면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이와 같이 교류를 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위의 내용을 볼 때 두 사람은 매우 친한 사이일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대화를 할 때는 짧게 합니다. 몇 차례 말이 오가지도 않지요. 비록 잘 아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과는 말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지만 어떤 사람은 금방 말이 끊깁니다.
비록 잘 알아도 심리적으론 거북하거나 서먹하다는 것이지요.
에릭 번은 인간이 서로 교류하는 방식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에 평행교류, 교차교류가 있다고 합니다.
평행교류와 교차교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릭 번은 인간의 자아를 크게 어버이자아, 어른자아, 어린이자아로 나누었음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 평행교류란 예를 들어, 나는 세 자아 중 어버이자아상태에서 이야기하고 ‘너’는 어린이자아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계속 동일한 자아상태에서 이어지는 교류를 말합니다.
- 교차교류란 예를 들어, 나는 어버이자아상태에서 말하고 ‘너’는 어린이자아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나와 너는 다른 자아상태에서 이어지는 교류를 말합니다.
그러니 시인이 말한 ‘지붕이 지나고 바다를 지나며 바람 속을 오간다’는 것은 그들의 대화가 이와 같은 교류방식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왔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서로간 대화를 ‘비’, ‘바람’, ‘눈’등의 일기로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비, 바람, 눈은 모두 서로가 대화를 할 때 그 느낌이 이슬비 혹은 폭우가 내리거나, 산들바람 혹은 태풍이 몰아치거나, 상서로운 눈 혹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을 말한 것이지요. 이러한 비, 바람, 눈은 ‘나’와 ‘너’가 느끼는 ‘감정’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에릭 번은 인간이 교류, 즉 서로간 자극과 반응을 이어가는 진짜 이유를 인정자극을 주고 받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대화 내용은 때론 정보를 주고 받을 수도 있고, 자신의 신세타령이 될 수도 있고, 때론 누군가를 뒷담화할 수도 있으며, 때론 남에게 힘을 주는 이야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 속에는 ‘나’가 바라는 것을 ‘너’가 주면 ‘나’는 기쁘고 힘이 나며, 반대로 ‘너’가 나에게 내가 바라는 것을 주지 않거나 오히려 받고 싶지 않은 것을 주면 내 마음은 서운해지기도 하고 화날 수도 있으며, ‘너’가 꼴보기도 싫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쁘고 힘이 난다, 서운하다, 화가 난다. 꼴보기도 싫다’란 것은 상대방의 자극을 통해 자신이 받은 ‘인정자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너’와 ‘나’가 오래 말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좋은 인정자극’을 서로 주고 받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인정자극을 받을 때 우리의 사이는 서로 힘들어 지거나 멀어지거나 할 것입니다.
서로간 긍정적인 인정자극을 주고 받을 때는 말이 잘 통한다고 하며 서로 항상 붙어 살아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살림도 차리고 고층 집도 지으며, 아이들도 6~7명도 낳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너’와 ‘나’는 서로 인정자극을 주고 받으며 잘 살아온 것 같은데 이상하게 너와 나의 사이는 뭔가 삐걱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때 나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이젠 가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딪히고 으깨져서 깨진 돌들이 가득 찬 돌밭같다고 합니다. 말은 거칠어지고 뼈마디가 우두둑 거리듯이 서로 말하는 것이 고단하고 힘들어집니다.
마치 오랫동안 잘 살아온 부부가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서로 맞지 않아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게 잘 지내온 너와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 공허해졌기 때문입니다. 온 사방이 빈 것 같습니다. 한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인정자극을 주고 받으면서 아주 좋은 사이라고 생각하며 잘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를 ‘나’는 생각해 보니 빈 것 같은 마음.
‘공허하다’는 뜻이지요.
‘나’는 그것을 내 마음을 가득 채워주는 진정한 말을, 너의 마음을 잘 메워주는 진정한 말을 못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너는 너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지만 ‘너는 내 마음을 몰라’.
우리는 마음이 잘 맞아 서로 살림 차리고 큰 집도 짓고 아이들도 많이 낳은 것 같기에 행복한 줄 알았는데, 정작 그 안에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공허할 때, “그렇구나. 어떻게 하면 내가 너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까?”라고 내 마음을 만져주면 좋은데,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이렇게 집도 크고 자녀도 성공했고, 누가 봐도 모자랄 것이 없는데 왜 그러는거야 대체?”라고 나를 비난하는 듯한 너.
‘진정이라는 말을 두려워 하는’, 즉 나의 마음을 진심으로 읽어주는 말을 못하는.
‘은폐의 늪 그 위에’, 나의 내면을 바라봐 주고 알아주지 못하는 늪과 같은 것을 초월해서.
‘침묵의 연꽃’, 오고 가는 사나운 자극과 반응이 아니라
‘단 한마디만 피게 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나의 마음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는 진정한 한 마디의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시인은 그러한 한마디의 말,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는 말 한마디를 ‘독’이라고 했습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요. 실제 이것은 독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정말 필요하고 고귀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만큼 마음을 읽어주는 진정한 말은 독과 같이 강렬한 인정자극이 된다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 독을 마시므로, 서로 따로 눕거나 눕더라도 서로 마주보지 않으려고 서로 등을 대고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이젠 서로 나란히 누울 수 있는 그런 사이로 회복하고 싶다는 것이지요.
2. 정리 및 소감
신달자님의 시, 오래 말하는 사이.
이 시는 결국 서로 교류를 하며 주고 받는 인정자극 중에 최고의 인정자극은 서로의 마음을 읽어 주고 보듬어 주는 그런 진정한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려고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좋은 선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인정자극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집을 사주어도 고마워하는 마음은 고작 몇 달도 못가지요.
원래 그 집에서 살아왔다는 듯이 말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찾게 되어 있더군요.
반대로 서로의 마음을 깊이 바라봐주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이 없을 때는, 결국은 무너지게 되며 이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지요. 부부의 경우 이때 ‘성격이 서로 안 맞다’란 말이 나오게 되지요.
솔직히 우리는 ‘나’의 마음조차도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못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큰 것이지요.
‘너의 마음, 나의 마음’.
서로 잘 바라봐 주길 바라는 신달자님의 시가 저의 마음을 반성하게 하는군요.
핑백: 심리통찰1_심리는 알아차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