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드라마 속 심리이야기 아홉번 째 이야기로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나온 대사 중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글입니다.
드라마에서는 ‘행복은 좇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 말이 과연 타당한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드라마 속의 대사
뭘, 행복하자고 그렇게 기를 쓰고 살아?
행복은, 좇는 게 아니고 음미야, 음미.
위의 문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문장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종료될 즈음, 동백이 자신의 간을 이식해 주어 살아난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엄마에게 한 말입니다.
엄마가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보상 받으려는 듯이 기를 쓰고 사는 모습을 보이자 웃으면서 한 말이지요.
사실, 드라마 속의 동백은
아빠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가 4살쯤 되어 생계가 너무 어려워지자 엄마가 고아원에 버려두었고,
20대 초반 청년이 되었을 때는 야구 선수인 남자친구의 태도가 이전과 많이 달라지자
‘버림 받기 전에 먼저 버리겠다는 심리’로 남자친구의 아기를 밴 채 일방적으로 떠났으며,
아기를 데리고 낯선 마을에 들어가서 남자들에게 음식과 술을 파는 일을 하므로 동네 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길을 받으며 살아왔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행복을 좇지도 음미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누군가가 그녀에게 ‘당신의 행복에 대해 음미해보라’고 했다면,
처음에는,
‘내가 뭐가 행복해?
아 그래도 굳이 행복하다고 한다면, 아들이 내 옆에서 무럭무럭 자라주었으니 행복한 거네’
정도로 자신의 행복을 음미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드라마 마지막 순간 자신의 행복을 음미한다면,
자신을 믿어주고 보호해주는 한 남자가 생겨서 기쁘다는 것,
원망의 대상이었던 엄마가 이젠 자신의 곁으로 돌아와서 좋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이제 자신을 동네 일원으로 받아주어서 고맙다는 것,
드라마 내내 공포 분위기를 주었던 살인마 ‘까불이’를 직접 잡아 그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다행이라는 것으로서
이것들은 모두 자신이 좇아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것인데,
동백은 이런 것들을 음미하며 ‘나는 행복하구나’라고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2. 행복을 목표로 해서 행복을 좇는 것이라면
행복은 좇는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 유명한 동화가 바로 안데르센의 ‘파랑새’이지요.
안데르센은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으므로 멀리 좇아갈 필요가 없으며 우리 주변에서 찾으면 된다고 알려주었지요.
그런데 동백은 “행복하자고 그렇게 기를 쓰고 살아?”라고 했으니 그 의미는 ‘행복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사는 것은 옳지 않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행복이 목적이자 목표 자체가 됨을 의미합니다.
즉 ‘나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살고 있다’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지요.
만약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여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는 행복하도록 하는 수단이나 조건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행복하기 위해 좋은 집이 있어야 하고 많은 재물이 있어야 하며,
일할 좋은 직장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잘 따르는 착한 자녀들이 있어야 하며…….. 있어야 한다’와 같은 조건식이 부착될 것입니다.
또한 조건 대상의 볼륨이 커지면 커질수록 행복의 크기 역시 더 커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에 다니는 것보다는 대기업에 다니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다’가 적용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그 조건들의 볼륨이 더욱 더 커지게 하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기를 쓰고 공부를 잘하도록 다그치는 이유는, 공부를 잘하면 잘할수록 그러한 조건들을 잘 충족시킬 뿐만 그 조건의 볼륨을 더 크게 함으로서 자녀들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일정 부분 수긍하면서도 모두 수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재벌이나 권력가들과 같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행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꼭 그렇지 만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절대적인 최고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생각보다 행복을 충족하기 위한 조건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며,
어떤 인간이라도 모든 조건을 다 충족시킬 수 없는, 즉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결핍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는 재력이나 권력으로도 사거나 구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행복을 음미한다는 것이란
그런데 동백은 ‘인간은 행복을 목표로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먼저 음미란 단어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음미(吟味)란 단어를 찾아보면,
-
시가(詩歌)를 읊조리며 그 맛을 감상하는 것
-
사물의 속 내용을 새겨서 맛보는 것.
● 첫째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시가(詩歌)를 읊조리며’는 시 혹은 노래를 읊조리며,
‘그 맛을 감상하는 것’은 그 시 혹은 노래 속에 담겨 있는 깊은 맛을 느껴보는 것이 될 것이며,
이때 감상하는 사람은 그 감상을 통해 큰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 또한 둘째 뜻은
시가(詩歌) 대신 어떤 사물로 대체되었을 뿐 그 속 깊은 내용을 마음에 새기며 맛을 보기에 이 역시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음미한다면, 그 속에서 ‘기쁨’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음미한다’란 ‘기쁨’이란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 앞에서 말한 ‘행복을 목표로 좇는다’은 무슨 감정을 기반으로 할까요?
이를 깊이 느껴보면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란 두려움이 그 내면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행복을 목표로 좇는 것’은 근본적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복론’이라면,
‘행복을 음미하는 것’은 ‘기쁨을 얻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두려움을 벗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하기에 어떤 조건들을 모두 채운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며, 많은 경우 오히려 뭔가 마음 속에 허전함 등이 존재하는 것은 두려움은 벗어났지만 그 내면에 행복을 채운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음미함으로 기쁨을 얻을 때는 더욱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이란 우리의 내면에 기쁨이 있을 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4. 정리 및 소감
그런데 음미하는 행복은 어떤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기쁨이 아니라 머리로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뇌과학을 빌어 말한다면, 어떤 자극에 대해 편도체로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전두엽을 통해 생각하면서 느끼는 기쁨이라는 점입니다.
편도체에 의한 기쁨은 매우 자극적인 기쁨을 요구한다면, 전두엽에 의한 기쁨은 좀 더 통찰을 기반으로, 즉 깨달음을 통해 기쁨을 얻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백이 말한 ‘행복을 음미한다’란 것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음미하며
그 안에 있는 것을 깨달아 기뻐함을 기반으로 하는 행복이기에
기를 쓸 필요도 없으며, 어느 조건을 맞추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으며,
자신의 주변의 것을 관조하며 그것을 내면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백의 말은 고차원적인 행복에 해당되며, 그의 말은 명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행복해지길 바라는가에 따라 행복의 질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론, 두려움을 피함으로 행복해지길 바라는 심리, 기쁨을 얻음으로 행복해지길 바라는 심리.
“나는 어떤 심리를 바탕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면 좋겠단 생각이 드는군요.
이 글을 흥미롭게 보신 분이라면 동백의 또 다른 명언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를 읽어보신다면 또한 흥미로워하시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