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해바라기의 ‘갈 수 없는 나라’를 만나보기로 하겠습니다. 해바라기는 1980년대에 듀엣으로 많은 감성적인 노래를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던 가수팀 이름이지요.
이 노래는 해바라기의 이주호님이 작곡하였고 소설가이자 교수였던 조해일님이 작사하였습니다. 노래는 해바라기의 팀멤버인 이주호님과 유익종님이 불렀습니다.
그럼 먼저 이 노래에 담겨진 가사 전문을 만나보겠습니다.
1. 해바라기의 ‘갈 수 없는 나라’ 전문
2. 가사 속의 이야기들
위의 가사를 보면 다양한 상상이 가능합니다.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한편의 드라마가 보이는데요. 그 이야기는 사람들마다 각각 다를 수 있겠지요.
이 가사를 토대로 한편의 짧은 이야기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등장인물은 ‘나’ 그리고 ‘너’입니다.
(1)
‘나’란 사람은 ‘사랑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말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일 수도, 타인에게 불신을 받아 온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전에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지만 그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거나, 사랑을 거부당해 그의 마음은 총맞은 사람처럼 구멍나고 빈 가슴이 되어 공허 속에 빠져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엔 아직도 남아있는 통증으로 힘겨워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나’란 사람은 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 맞고 혼나면서 자라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청년 시절에 짝사랑하듯 매달린 여성에게 결국 버림을 받았고, 이때 너무너무 괴롭고 힘들어 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람에 대한 불신이 더욱 생겼습니다. 그의 마음은 항상 빈 것 같았고 무언가를 채워야 살 것 같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뭔가 무심하면서도 다소 냉소적이 되었습니다.
(2)
‘너’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키가 크지 않은 아담한 여성이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고 편안해 했습니다.
몸은 작았지만 항상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있었고 타인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었으며 때론 사람들에게 매우 헌신적인 여성이었지요. 가냘프면서도 미소를 띠고 타인에게 헌신적인 모습. 그것이 사람들에게 비춰진 캐릭터였습니다.
인간의 기질성향을 나눌 때 크게 ‘주도적이거나 섬세하거나 사교적이거나 수용적인 것’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경우 ‘수용적인’이 측면이 높은 사람이었지요. 이런 사람은 어릴 때부터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들에게 공감적이며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양 받아주는 상대방을 잘 품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성은 기질 자체가 타인에게 헌신하는 타입인데 어린 시절에 부모님들이 장사를 한다고 매우 바빠 어린 동생들을 혼자 돌보면서 가사일을 했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들을 업고 다녔고 그들을 씻기고 밥 먹이고 했었던 것이지요. 부모님들은 그런 그녀를 칭찬해주었으며 이 아이는 그 칭찬이 좋아 더욱 열심히 동생들을 돌보고 가사일을 했었지요.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 대해 ‘희생적인’ 심리가 형성되게 됩니다. 자신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사람을 바로 알아차리게 되지요. 그런 대상들에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 중에는 ‘정서적 결핍’ 심리까지 형성된 사람이 높습니다. 타인에게 희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을 멈추고 타인의 감정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감정조차도 ‘나의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만을 느끼는 경향이 높아집니다.
그런 여성이 우연찮게 ‘나’란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란 남자 역시 ‘너’란 여자를 알게 된 것이지요. ‘나’란 남성은 처음 ‘너’란 여성을 알게 되었을 때 여전히 무심하고 시크했습니다. ‘너’란 여성도 그런 ‘나’란 남성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끌림’이 있었습니다. 상대를 보았을 때 상대가 자신의 이상적인 외모를 가진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상대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끌림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은 설명이 가능했지만 왜 상대에게 끌렸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끌림이 강했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눈치를 주게 되었습니다.
서로는 점점 상대가 자신에게 관심있음을 느끼게 되었으며 결국 그들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치 자신의 허기진 마음을 채우듯이 상대에게 열중하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했지요. 행복을 꿈꾸면서 말이지요.
(3)
그런데 ‘나’와 ‘너’의 끌림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상하게 ‘너’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갔습니다. 아니 웬지 싫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습니다. ‘너’는 ‘나’에게 너무 잘해주는데 그 잘해주는 것이 싫고 걸리적거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너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나’가 그러면 그럴수록 ‘너’는 더욱 헌신적이었는데 그럴수록 ‘나’는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한 사람은 ‘쫓아가는 자’, 한 사람은 ‘도망가는 자’와 같았습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나’란 사람은 기질적으론 ‘섬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심리적으론 어린 시절부터 ‘타인을 믿지 못하고, 상대가 자신을 상처주기 전에 밀어내는’ 심리가 형성되어 있던 것이지요.
‘나’란 사람은 ‘너’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모습이 ‘거짓’같았습니다. 그의 내면엔 세상의 사람들은 ‘믿지 못할 사람, 결국 나를 떠날 사람’이란 마음이 숨겨져 있었는데, ‘너’의 과도한 헌신과 희생이 오히려 그런 마음을 촉발시킨 것입니다. 자신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고 싶은데, ‘너’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고, 그런 그녀의 행동은 거짓 같다고 냉소적으로 자꾸 보게 된 것입니다.
‘너’는 그러한 ‘나’의 모습에 매우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남편에게 헌신하였는데 그의 태도가 너무 이상했고 상처받았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가까이 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가까이 가는 것이 이젠 두려웠습니다. 그렇다고 ‘너’는 ‘나’에게 모든 것을 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가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은 여전히 챙겨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청년시절부터 다니게 된 종교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새벽에 기도를 하러 갔었고 집에 와서도 많은 시간을 종교에 몰입하곤 했습니다.
‘나’는 그것도 싫었습니다. 그녀가 종교에 몰입하는 것이 싫은 것인지 자신에게 이전처럼 하지 않은 것이 싫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느낌은 짜증나고 싫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이전에 잘 하지 않던 은연 중에 상처 주는 말들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가까이 가려는 행동도 했지요.
‘너’는 ‘나’의 이런 행동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려한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마음을 열고 그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먹는 음식은 물론이고 그가 원하는 것은 다시 잘해 주려 했고 남편은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뭐가 못마땅했는지 ‘나’는 ‘너’에게 은연 중에 ‘너’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마치 길들이기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너’만 ‘나’에게 길들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너’가 해주는 것이 편해졌고 좋았습니다. ‘너’가 없으면 ‘나’는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종교기관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못이기는 척 따라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너’가 자신에게 헌신적으로 잘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주는 것이 보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나’의 그런 보답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헌신’과 ‘보답’의 관계가 이들 사이에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너’는 힘이 들었습니다.
이전에도 마음이 힘들긴 했지만 이전과는 달리 자꾸 마음도 몸도 지쳐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상 사는 것에 뭔가 빠진 느낌이었습니다. ‘나’와의 관계는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였습니다.
‘나’는 ‘너’를 밀어내지 않았고 가끔 자신에게 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픈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프니 이상하게 몸도 아파왔습니다. 병원에 가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검사를 받아도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만 합니다.
자신이 왜 이런지 알 수 없었던 ‘너’는 그렇게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어딘가에 아픔이 오면 다시 몸이 말을 안 듣고 아파지는 것. 마음과 신체가 서로 연결되어 통증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너’는 자신의 살날이 많이 남지 않음을 직감했습니다.
‘나’는 그런 ‘너’를 보았을 때 매우 당황했습니다. 이젠 점점 ‘너’가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는데 ‘너’는 점점 아파서 힘들어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어야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인가 그녀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너’는 ‘나’앞에서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4)
‘나’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너’는 그 연약한 몸으로 자신에게 헌신했으나 자신은 그저 보답만 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너’를 슬프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땅이 아니라 그녀의 종교에서 말하는 그곳으로 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곳은 그녀의 본향이며, 그녀가 궁극으로 가길 원했던 곳이며, 그곳은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곳.
그녀가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그곳’뿐이란 생각이 미쳤습니다.
‘너’는 결국 ‘나’에게 보답을 받았을 뿐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이 외롭고 공허하고 우울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신체화 반응으로 일어난 것이지요.
(5)
‘나’는 덜덜 떨렸습니다.
이제 ‘너’의 진정한 슬픔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슬픔의 원인은 ‘나’의 사랑없는, 정이 없는…
‘너’는 주기만 하고 제대로 받지 못함으로 생긴 마음의 병.
그녀를 죽게 만든 사람은 자신이라는 죄책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오열했습니다.
‘나’ 때문에 ‘너’가 죽었다고.
그렇게 ‘너’는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나라로 갔습니다.
너를 만나면 도저히 미안하고 죄송해서, 얼굴을 마주하기 죄스러워 만나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나라.
‘나’는 그런 미안함과 죄송함으로 눈물 흘리며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았습니다.
‘너’는 그런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지요.
3. ‘해바라기의 갈 수 없는 나라’ 단편드라마 소감
해바라기의 ‘갈 수 없는 나라’.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까 저도 마음이 먹먹해지는군요.
실제 심리상담을 할 때에 이와 같은 관계의 분들이 종종 만나곤 합니다. 복잡한 심리관계를 가진 것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애정’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것을 심리에서는 ‘인정자극‘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사람은 생각보다 순수한 애정을 잘 주지 않지요. 애정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심리적 허기를 잘 가지지요.
또한 많은 경우 ‘끌림’에 이끌리어 자신에게 상처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정말 서로에게 진정한 애정의 마음으로 애정을 잘 주고 받으며 살아야 후회없을 것입니다.
너의 ‘갈 수 없는 나라’. 나의 ‘갈 수 없는 나라’.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하여 결국 이것이 죄책감으로 형성될 때 생길 수 있겠지요.
살펴보니까 해바라기의 노래 가사들이 참 멋지더군요. 다음 언젠가 해바라기 노래를 다시 한편 살펴보면 좋겠더군요. 추천해 주시면 좋겠군요.
이전에 아이유님의 ‘러브 포엠’, 상처받은 사람을 위한 위로의 노래였지요. 아직 이 글을 못본 분들은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위의 ‘나’와 ‘너’에게 한편의 치유의 글이니까요.
끝까지 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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