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창세기 2장 18절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의 말씀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1. 창세기 2장 18절 성경구절
2. 이야기 나눔
저희 연구소에서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사랑’이란 주제로 스토리테라피의 시간을 가졌을 때였습니다. 그 때 주제가 사랑 중 ‘남녀간의 사랑’이었으므로 아무래도 배우자와의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지요.
그 때 제가 참여한 선생님들께 질문했었습니다. “혹시 결혼하기 전에 프로포즈를 정식으로 받아 본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면 보통 4십대 5십대는 눈만 껌뻑껌뻑…하지요.
저도 옛날 사람이라 프로포즈가 뭔지도 모르고 결혼을 했었는데, 그런 것은 ‘창문을 열어다오~ 내 그리운 마리아~’를 부르는 서양사람들이나 하는…
그런데 한 분이, “예, 저는 받았어요~”
30대 초반의 여성분이었습니다.
“역시 젊으시니까 프로포즈를 받으셨네요. 남편분이 어떻게 프로포즈했나요?”
성향이 대단히 활달하신 분이었는데, 그 분은 “아, 짜증나. 글쎄요. 저희 남편이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입니다.’라고 프로포즈하더라구요.”
그 때 모두 ‘와~’란 함성인지 탄성인지를 외쳤지요.
남편이 프로포즈한 것은 태초의 인간 아담이 하와에게 한 프로포즈이지요. 그러고 보면 태초의 인간도 멋진 프로포즈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젊은 선생님은 그 프로포즈가 좀 올드해 보였나 봅니다.
성경 창세기 2장에 보면, 신께서는 아담을 보시며 다음과 같이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세기 2장 18절)’
그래서 하신 작업이 아담을 재우신 후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지요.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 눈에 반한 아담은 당장 프로포즈를 하며 결혼에 골인하여 부부가 되어 인류 최초의 ‘가족의 탄생’이 됩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이야기가 꽤 재미있었으며 청년시절에는 신께서 창조 당시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하셨기에 이를 위해서는 자녀를 출산해야 하므로 그런가 생각했었습니다. 실제 그 결과로 현재 인류만 따져도 76억 명이 되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이 말씀이 참 달라 보입니다. 단지 ‘생육하고 번성하라’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먼저 심리상담하면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어느 청년이 갑자기 말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익었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몇 달 전에 한 차례 방문했던 청년이더군요. 부모님들이 ‘네가 왜 상담이 필요하냐?’고 해서 그만 두었던 케이스였습니다.
그는 요즘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 속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청년으로서 외모는 건장해 보였지만 얼굴만 보아도 심리적으로 심각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기에 직장에 취직하기 쉬웠으나 오래 붙어 있지 못합니다. 마음이 쉽게 요동치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으며 그것을 게임으로 채우려다 게임중독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기 시작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죽음의 유혹과 사투를 벌이나 봅니다.
더구나 최근에 결혼한 누나들과 매형들까지 합세해서 자신을 가운데 두고 ‘너 정신차려라’라고 몰아 붙였다고 하더군요. 아무도 그의 상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말을 하더라도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면 사람이 심리 문제에 빠져도 외모는 멀쩡하게 보일 뿐 그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그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목숨을 끊는 많은 사람은 평소에 ‘예 예’하며 밝은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나만 없어지면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가족상담이나 부부상담, 혹은 개인상담을 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모습은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몸부림’입니다. 특히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더욱 무섭게 몸부림칩니다. 그것이 마지막 보루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몸부림 치다가 점차 꺼져 가는 촛불이나 모닥불처럼 사그러져 가는 것이지요.
3. 심리학 이론
교류분석이란 심리학이 있습니다. 이때 교류의 의미는 ‘자극과 반응이 오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소통)하는 것도 자극과 반응이 오고 가는 것이지요. 단순한 예로서 물건이 필요해서 상점에 가서 물건을 구입할 때 서로 말을 주고 받습니다. 자극과 반응이 오고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극과 반응 속에는 진정으로 숨어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너와 내가 서로 만나 결혼하고 사는 것은 서로간 자극과 반응을 주고 받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자극과 반응 속에서 ‘인정자극’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가 진정 받고 싶은 것은 바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가스펠 송에서 ‘사랑’이 바로 인정자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께서 아담에게 파트너 하와를 만들어 주신 것은 하와가 있어야 아담이 잘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아담이 있기에 하와가 잘 살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이 서로 상대를 인정해주고 또 인정받음으로 그들의 심리는 건강해지고 건강한 상태에서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혹시 ‘나는 세상 사람은 필요없고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된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이 이야기는 참으로 안타까운 말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얼핏 신앙이 꽤 좋은 말같이 들리지만 세상 속에서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 힘겹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제가 기독교인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심리상담이나 교육을 할 때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하곤 합니다. 저는 이를 매우 고맙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제가 연구소를 연 목적이 ‘말씀과 생활의 일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 이유가 심리와 관련된다고 본 것입니다.
기독인의 가정이 파괴되거나 갈등 속에 힘겨워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신에게는 매달리는데 가족과 이웃과는 냉랭하고 소모적이 됩니다. 자신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자신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경우 당연히 ‘말씀과 생활이 일치’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가족간 이웃간 서로 ‘인정해주고 인정받고 살아가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되어야 하나님나라의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듯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내가 타인을 잘 인정해주고 타인이 나를 잘 인정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을 심리적으로 ‘건강한 생활자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인정받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이것이 되어야 신앙인으로서 ‘말씀과 생활이 일치’가 될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즉, 내가 남을 인정해주고 남에게 잘 인정받는 것이 건강한 심리상태일 뿐만 아니라 말씀과 생활이 일치할 수 있는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히브리어 레바도와 에제르
창세기 2장 18절의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레바도와 에제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들의 원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바도’는 ‘혼자’, ‘외롭다’, ‘고립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 외에 출애굽기 18장 18절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하나님의 일을 혼자서 하지 말고 도움을 받으라고 할 때, 시편 25편 16절에서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에서 ‘외롭고’가 ‘레바도’의 단어이지요.
‘에제르’는 히브리어로 ‘도움’, ‘보호’, ‘조력’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령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 도우시, 권고자라고 불리는데, 이때 사용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구약의 에제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의 돕는 배필로 여성을 창조하셨는데,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에제르 케 네그도는 ‘필수적인’, ‘본질적인’ 도움을 의미합니다. 여성은 남성의 부수적인 도우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존재입니다.
5. 정리와 소감
창세기 2장 18절의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신께서 인간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하셨기에 그에 합당한 조처를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나 타인의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심리적으로 ‘외로움’에 빠지는 방식과 ‘외로움’에 빠진 사람의 심리가 어떤지와 또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등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스런 심리를 천지창조 당시부터 이해하고 계시며, 여전히 우리의 심리를 잘 안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인간의 심리를 잘 모르나 창조주께서는 인간의 몸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아를 만들었기에 그에 따른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신다는 것, 오늘의 말씀에 이것을 가득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은 이 글의 다음 편에 해당되는 창세기 2장 24절 부모를 떠나_인간관계 심리 이해 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
핑백: 창세기 3장_아담과 하와의 기질성향과 심리적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