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48: 시 출항으로부터의 안식을

이애경의 출항

이애경의 출항으로부터의 안식을

멀고도 먼 바다 저편
십수 년도 더 흘러
노구의 몸으로
밟아보는 고국 땅

흐릿하게나마 흐르는
당신과의 아련한 추억들은
따뜻한 기억이 없어
차라리 슬픈데

온 몸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건네는 작별의 몸짓 사이로
호스피스의 마지막 손길은

고국대지에 안겨
평안히 내쉬게 한다
마지막 호흡을

영혼의 닻을 내린다
출항으로부터의 안식을

평안하소서

 

‘죽음’이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의 삶은 죽음을 대면할 때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깊이 있게 찾고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해 겨울 제주도에 갔을 때 뚜벅이로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떤 삶을 살고 계시는지 다니며 일상을 마주할 때가 있었습니다.

언덕 위 아름다운 집주인은 기웃거리며 집구경하는 낯선 저희들에게 ‘정낭’이라 부르는 제주도 대문 빗장을 열어 집 내부구경도 시켜 주시고 어떻게 이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지 그 사연도 자연스레 말씀해주시고 차도 대접해주시고 화장실도 선뜻 사용하게 해 주셔서 제 마음엔 늘 고맙고 좋은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게 조금은 충격으로 다가온 전경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무덤들이었습니다.

마을 안, 집 앞 등 삶의 현장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조상들의 묘들이 펼쳐진 모습들은 가던 길 멈추고 한참동안 무덤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지역의 특성상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이 무덤들을 이렇게 가까이 마련해놓고 지내는 이들의 풍습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여행을 다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해석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선택이 아니라 누구나 반드시 맞이해야 할 죽음은 우리들 삶 가까운 곳에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산 교육의 교실이기도 한 것 같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의 오랜 지인이 같은 마을에 살다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외항선 생활을 하시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의 부고를 듣고 달려가 조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인이 되신 영정 사진 앞에 하염없이 울었던 그 때, 그 분의 삶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저의 아팠던 마음을 위의 시로 적어 위로와 더불어 남은 삶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의 아픔을 이렇게 언어화하고 시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마음과 생각들이 엉켜 보다 길게 힘들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뭍보다 바다에서 더 많은 삶의 항해를 했어야 했던 그의 삶이 이제는 소망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되이 바라볼 때 365번의 기회가 주어진 한 해의 “살림”, 말 그대로 “살리는 삶”이 보다 가치있는 삶의 대책으로 새롭게 마련되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이애경님의 시와 글을 마주했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다가왔지요. 이에 대한 감회를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처음 떠오른 것은 이애경님이 글에서 언급한 제주도 여행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에겐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매우 필요한 시기였고 그러기 위해서 그때 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단 쉬자’라는 마음으로 급하게 제주도 여행을 실행했습니다. 그 당시 가기 전에 결정한 것은 ‘보름간 지낸다. 장소는 제주 조천읍에 있는 어느 펜션이다’. 이 두 가지만 정해 놓고 제주도에 가서 제주 생활을 맛보았지요. 두 사람이 신혼여행 이후 처음 갔던 제주도였고, 둘만 다녔던 여행도 그 때가 처음이었지요. 

12월 조천읍의 펜션은 온통 귤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길을 가다 손을 조금만 뻗어도 귤에 손이 닿을 정도였지요.

당시 여행 방식은 하루는 밖에서 여행하기, 다음날은 펜션에서 머물기. 여행은 미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는대로. 저와 이애경님 둘다 성향상 N과 P가 높았기에 그런 방식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현지에 있는 교회 목사님 내외를 알게 되었고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 서귀포, 성산봉, 여러 오름 등 다른 지역들도 간 적이 있었고, 펜션에 교회분들이 찾아와 담소는 물론 이애경님이 이침을 시전하기도 했었지요. 참으로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둘이서 시골길을 여행을 할 때 아름다운 집들이 보이곤 했습니다. 그때 과감하게 그 집 초인종을 눌렀던 적이 몇 차례 있었지요. 다행히 그 집 문이 활짝 열리곤 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놀라운데 그 집의 문이 열린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던 것 같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지은 자신의 집을 유심히 살펴보는 두 명의 여행객들. 딱봐도 부부 사이. 남자만 보면 열어주고 싶지 않았을텐데, 여자가 매우 참하고 인상이 좋아보이니… “들어오세요”란 답을 듣게 된 것이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인사나누고 나올 때면 유기농보다 더 좋은 무농약 귤이나 그 무엇을 바리바리 싸주신 것으로 기억이 나는군요.

그렇게 시골길을 가노라면 다양한 묘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묘는 밭 한 가운데, 어느 묘는 길가에, 어느 묘 집 근처에, 어느 곳에서는 어느 종씨들로 이루어진 묘지들로 장관을 이루기도 했었지요. 제가 이전에 자주 보았던 묘지와는 그 느낌이 자못 달랐었지요. 돌로 쌓여진 제주 특유의 묘지들, 겨울이란 그런가 누런 억새들과 풀들과 나무들과 어울려 있는 모습들, 게다가 12월의 겨울바람이 자아내는 그 무엇이 참 오묘하다고 할까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들을 바라보며 저는 사진 찍느라고 여념이 없었는데, 이애경님은 그때 죽음에 대해 깊은 상념이 많았나 봅니다.

이애경님이 쓴 시는, 매우 가까운 친족 중에 한 평생 외항선 선원으로 사셨다가 작고하신 매우 가까운 한 분을 기리는 시입니다. 그 당시 저는 함께 가지 못하고 이애경님이 혼자 간 것으로 기억나는군요.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랜 동안 외항선의 마도로스로 살아오시다가 병환을 안고 육지로 오셨으나 이제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매우 많은 사촌 오빠로 기억되는데 대부분 바다에서 사시었기에 자주 뵙지 못했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제 죽음을 맞이해선 고국의 땅에서 영면하시길 기리는 시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이애경님이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시를 한자 한자 써내려갔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 시와 글을 읽으면서 떠 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 땅의 사람들 중에 죽음에 대해 이와 같이 시 혹은 글로 적어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시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마치 축약하여 표현하는 작업이라면, 글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풀어내어 정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제가 ‘죽음’입니다. 이 주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시로 표현하고 글로 정리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지요. 대부분, 죽음의 장면을 눈앞에 목격하면서도 의식의 흐름은 흐르다 무언가에 막히는 듯하고, 또한 얕게 흐르다 멈추어 버리곤 할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으면서도 정말 마주하기 싫은 가장 두려운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애경님은 자신이 왜 죽음에 대해 시와 글로 남기는지를 다음과 같이 남겼네요.

만약 그 때의 아픔을 이렇게 언어화하고 시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마음과 생각들이 엉켜 보다 길게 힘들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무엇이다’라고 정확히 인식하기 어려운 마음의 통증이 따르는데, 이를 언어화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마음과 생각들이 더 복잡해져 더욱 고통스러워지고 힘들어지기에, 이를 피하기 위해 사전에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는 작업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되이 바라볼 때 365번의 기회가 주어진 한 해의 “살림”, 말 그대로 “살리는 삶”이 보다 가치있는 삶의 대책으로 새롭게 마련되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그 죽음을 마주할 때 죽음의 반대말인 ‘살림’이 가능하며, 그 살림은 바로 ‘가치있는 삶’의 기회를 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은 ‘나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깊이 생각할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 ‘남아 있는 나의 인생을 보다 가치있게 살아가자’라고 정리하며 보다 새롭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젠 이애경님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마도 이애경님은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미소를 머금으며 ‘나의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란 이생에서의 마지막 시를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이애경님의 죽음을 이와 같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저에겐 ‘인생의 살림’을 더욱 생각하게 하며 ‘보다 더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 더 생각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언젠가 저 역시 죽음을 맞이할 땐, 저 역시 미소를 머금으면서 마지막 시구를 쓸 것이고 또 누군가는 깊이 있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살림’ 속에서 가치 있는 삶의 기회를 제공받지 않을까란 소망도 생기는군요.

이럼으로서 인간은 마지막엔 ‘출항으로부터의 안식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정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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