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13: 시 에움길 위에서

이번 글은 이애경의 열세번째 선물, 시와 글 ‘에움길 위에서’입니다. 에움길이란 지름길과의 반대로 빙 둘러가는 길을 말하지요. 과연 이애경님의 ‘에움길’,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에움길 위에서

이애경의 에움길 위에서

 

사랑한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해
서러운 날은

어찌할 바 몰라
에움길 위에 외로이
서성인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
떠나보내지 못해
서러운 날은

최후의 후회가 되어
사는 날 내내
슬픔으로
진주를 낳는다

 

소중한 사람과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이별하거나 죽음으로 헤어지게 될 때 그 비통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위의 시적 화자는 자신에게 소중했던 사람과 이별을 못하여 지름길이 아닌, 빙 둘러 가는 에움길 위에서 평생을 홀로 서성이며 이별식을 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해봅니다.

그것은 남은 삶의 여정에 후회로 남는 미해결 과제가 되어 진주를 낳는다고 표현하고 있네요.

왜 이토록 아픈 걸까요?…

우리는 죽음이라는 슬픔을 표현하도록 물어볼 수 없는 금기사항 같은 문화 속에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요?..

저에게도 최근 몇 년 사이 죽음을 통한 이별들을 경험하고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이렇게 죽음에 대한 의미를

삶의 곳곳에서 새로운 각도로 찾아보고 의미를 재구성하여 슬픔을 꺼내고

시로 언어화하여 표현하는 작업을 통해,

농도 짙은 애도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히려 삶의 자양분이 되어주었고 토대가 되어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걸어가도록 돕는 것

같습니다.

슬픔은 표현할수록 치유됩니다.

죽음을 포함한 상실(loss)은 전인생에서 낙태, 유산, 졸업, 이별, 이혼, 사별, 자살, 사직, 건강, 노년, 장례 등과 관련된 주제일 것입니다.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들어 줄 사람… 울음을 받아 품어 줄 신뢰할만한 누군가에게 당신의 슬픔을 표현하고 의미를 찾아 재구성해 가는 남은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애경과 꽃

 

 

이애경님의 ‘에움길 위에서’란 시와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에움길이란 지름길의 정 반대인 빙 둘러 돌아가는 길을 말하지요. 이애경님은 이 시에서 ‘사랑한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해서, 외로이 에움길에서 서성이며, 떠나보내야 할 사람 떠내보내지 못해서 사는 날 내내 슬픔의 고통을 통해 진주를 낳는다’라고 그 아픔을 표현하였네요.

이 시를 읽으며 대 놓고 말하지 못하는, 수도 없이 곱씹는, 그러다가 대개 자신의 마음 속에 묻어 두는 성향과 심리를 가진 이애경님의 모습이 떠오른군요.

이 시에서 말하는 이애경님의 에움길은 그녀 방식의 인생길임을 느끼게 되는군요. 그런데 그녀는 맨 마지막에 ‘슬픔으로 진주를 낳는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때의 진주란 무엇일까요? 

고통이 알알이 맺히고 응집되어 맺어진 그런 질고의 결과물을 보기 좋게 시적 언어로 사용한 걸까요? 

이런 의미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쓴 목적이 무엇일까란 생각으로 다시 글을 더듬으니, 이 글의 목적은 자신의 시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를 씀으로서 얻게 되는 이득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는 슬픔을 표현한 시입니다.

그런데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란 그녀와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녀는 슬픈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라고 했었지요.

성서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한 것도 몸에 통증이 올 정도로 너무 슬픈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위로’임을 표현한 것이며, 심리적 관점에서도 슬픔이란 상실의 감정, 즉 잃어버린 것으로 인한 통증의 감정이며, 잃어버린 것만큼 내 마음은 구멍남을, 그 구멍남을 메우지 못할 때 점점 구멍이 커짐으로 나란 사람 자체를 점차 상실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구멍남을 메울 수 있는 것이 ‘위로’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애경님은 이러한 슬픔을 당했을 때 자신을 스스로 애도함으로, 또한 그 애도를 통해 위로 받을 수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위로하는 방식은 여러 방식이 있습니다. 타인을 통해 위로 받을 수도 있으며, 스스로에게 위로 받을 수도 있으며, 자연을 통해 받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자신만의 그 무엇으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애경님이 선택한 위로 방식은 주로 ‘스스로에게 받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슬픔을 애도할 때에 펜을 잡고 시를 씀으로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끄집어 내어 바라봄으로 카타르시스와 같이 감정의 정화가 되기도 하고, 상실의 대상자를 피하지 않고 더욱 깊이 마주하면서, 서로에게 있었던 사연들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그 안에 얽혀 있던 서로의 감정들을 하나씩 분리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고, 이로서 이젠 그 슬픔을 떨구고 살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것이 애도과정의 결과물이자 위로의 이득이요, 이애경님이 말한 ‘진주’ 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 역시 이애경님과 비슷한 구석이 참 많아 보입니다. 그녀가 사고로 사망하였을 때 그녀의 사망을 세상에 즉시 알리지 않고 마음에 부여잡고 있다가 그 슬픔을 글로 쓰되 타인의 시나 노래를 빌어 간접적으로 그 슬픔을 표현했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이애경님과 저는 같은 과에 해당됨을 느끼니 괜히 씁쓸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드는군요.

이애경님의 이러한 방식은,

특히 같은 과의 사람들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들의 주요 위로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애경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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