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41번째 선물, 시 ‘지난 후에야’ 입니다. 우리는 세월이 지난 후에 그때가서 무언가를 깨달음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애경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이를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지난 후에야
짙은 어둠이 내린 후에야
여명의 찬란함을폭풍 몰아쳐 비 내린 후에야
햇살의 반가움을밟혀진 아픔의 눈물
닦아낸 후에야
움 트는 새생명의
소중함을마음의 창으로 봅니다
내 작은 심장에
겸손히 초대하여
담아봅니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여름’이라고 불리는 계절이 우리 곁으로 왔네요. 1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와 1년치 수다의 꽃을 피우려고 말을 거는 듯 합니다.
사람들은 만나면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실제로 1년만에 그립던 친구를 만나 이야기 꽃을 피운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까요?
보고 싶었다고.. 힘들었다고..
한 학기를 마쳤다고.. 아팠다고..
헤어졌다고..
친구에게 꽃다발을 받았다고..
여행을 다녀왔다고..
어머니 계신 무덤가에 다녀왔다고..
마음에 담아 놓았던 이야기를 풀어내어 전하면서 우리 내면의 느낌과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게 되고 많은 교훈들을 하나씩 깨닫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올해도 지난 여름처럼 더우리라 예상하는 여름의 과정을 겪고 지난 후에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닫게 될지.. 기대를 해 봅니다.
이애경님의 시를 몇 차례 읽어보았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애경님이 세상의 숨겨진 이치를 깨달은 내용을 쓴 것인가란 물음이 생기더군요.
한편으론 시인 박노해님의 여러 시들이 생각나더군요. 박노해님의 시는 자신이 세상의 이치와 관련해서 깨달은 바를 시어로 표현한 것들이 많았기에 이애경님의 시에서 오히려 박노해님의 색체가 느껴진 것이지요.
그런데 더 이 시를 계속 감상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시 속에서 이애경님이 명확하게 보이더군요.
먼저 이애경님의 ‘지난 후에야’란 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에서 인생의 고난과 고난 이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다음과 같은 세 장면이 나옵니다.
짙은 어둠이 내린 후에야
여명의 찬란함을
폭풍 몰아쳐 비 내린 후에야
햇살의 반가움을
밟혀진 아픔의 눈물 닦아낸 후에야
움 트는 새생명의 소중함을
위의 표현들을 보면 마치 명언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지요. 그런데 어린 아이나 청소년들 혹은 청년들에게 이 말을 한다면 큰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 아는 체 할 수는 있으나, 마치 피부에 얼음이 닿을 때의 짜릿한 느낌이기보다는 뭔가 겉도는 추상적인 느낌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언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감각인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입으로 피부로 실제로 느껴야 하며, 또한 보이지 않는 직관을 통해 ‘아!’하고 느끼면서 통찰의 부분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감각과 직관이 모두 사용되어 몸으로 마음으로 느낌이 강하게 와야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만약 감각으로만 느꼈다면 위의 말은 그저 고난을 당하지만 실제론 얻는 것이 없는 그런 느낌만 가질 가능성이 높으며, 직관으로만 느꼈다면 대단히 고차원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실제 그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 이것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경험이 있는 현자’들만이 위의 명언들을 세상에 말할 수 있고, 그들이 말할 때 듣는 이들은 그 말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은 위의 표현을 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아니라 ‘이애경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이지요.
그 이유를 시를 통해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마음의 창으로 봅니다
내 작은 심장에
겸손히 (그 명언들을) 초대하여
담아봅니다
이와 같이 위의 두 표현 모두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한 말이지요.
마치 ‘나도 이런 세상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싶어요‘라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위의 시구에서 이애경님이 선명히 보이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이애경님의 글입니다.
확실히 그녀의 시 말미에서 말한 것같이 이애경님은 위의 명언들을 자신의 작은 심장에 담은 듯합니다.
이애경님은 글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지요.
어느새 성큼 다가온 ‘여름’이라고 불리는 계절이 우리 곁으로 왔네요. 1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와 1년치 수다의 꽃을 피우려고 말을 거는 듯 합니다.
‘성큼 여름이 왔네요’라고 표현하지 않고 ‘여름이라고 불리는 계절이 우리 곁으로 왔네요’라고 표현한 것은 여름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여름을 1년에 한 번, 오랜 만에 만나는 친구로 대한 것이지요.
이애경님의 경우 많은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해외 선교지에 있는, 지구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비록 우리나라의 어느 땅에 있더라도 서로 깊은 약속을 하고 오랜 만에 친구를 만났었기에, 1년에 한 번 오는 여름을 이러한 친구와 같은 느낌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만나더라도 그녀의 경우 대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했겠지만,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그들의 인생 이야기였기에 깊은 애정으로 집중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은 서로의 인생 경험을 나누는 것이었기에 바로 오감과 같은 감각을 통해 짜릿하게 느끼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은연중 이애경님은 자신의 직관을 통해 뭔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마치 ‘연륜있는 현자’들의 깨달음을 자신도 가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애경님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네요.
마음에 담아 놓았던 이야기를 풀어내어 전하면서 우리 내면의 느낌과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게 되고 많은 교훈들을 하나씩 깨닫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었습니다.
올해도 지난 여름처럼 더우리라 예상하는 여름의 과정을 겪고 지난 후에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닫게 될지.. 기대를 해 봅니다.
글의 앞부분에서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오랜 만에 멀리서 온 친구들을 만나는 것처럼 표현했는데, 이 글을 보니 여름이란 친구를 오랜 만에 만나 경험하고 느끼고 하면서 무언가 깊이 깨달을 것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깨달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지요.
그러니 제 마음에 다음과 같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네요.
‘와, 이애경, 현자네 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