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31번째 선물, 시 ‘옆에 있을 게’입니다. 이애경님은 누구 옆에 있기를 고대하며 시를 썼을까요? 이를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옆에 있을게
방황의 여정이
널 힘들게 하여도
내가 옆에 있을게
그리움으로반항의 외로운 길이
날 힘들게 하여도
여전히 네 옆에 있을게
기다림으로너의 가방 속에 든
썩은 사과 하나 둘
다 꺼내어 놓는 날까지
내가 옆에 있을게
파아란 꿈으로
살기 바쁘다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여정 가운데 어느 날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한동안 넋을 잃고.. 힘들어 했던 때가 있었지요…
그 때 심정을 적어보았습니다.
여전히 삶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이렇게 아프고 힘든 마음을 밖으로 꺼내어 고심 끝에 한 줄 한 줄 적다 보니…
아이로 인한 고통에 매몰되었던 저를 안정시키고 아이와의 소통을 찾아가며 새롭게 현실에 균형을 잡아갈 수 있었습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오늘”이 새롭게 큰 자원이 되어줄 “추억 만들기”의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울보다 먼저 보는 것이 엄마의 얼굴이다’ -(Winnicott 1971)-
이애경님의 시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시를 먼저 읽고 글까지 다 읽고 나니 마치 파노라마같이 청소년기에 있었던 우리 아이들의 모습들이 떠오르더군요. 특히 큰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위의 시에서 이애경님이 표현한 ‘방황’ ‘반항’ ‘가방 속의 썩은 사과’.
이 단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참 마음이 아련하고 아파지더군요. 아이들의 모습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론 저의 청소년기와 청년기가 떠 오르더군요. 저의 경우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이 매우 암흑기였었고 이전엔 이 시절들을 기억에 지우고 싶은 마음이 꽤 있었지요.
저의 고등학생 시절은 남들의 눈에 그리 띄지 않으면서도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그런 학생으로 보였습니다. 문제 안 일으키고 공부만 하며 성격 좋고 밝은 그런 유형. 사람들에게 전혀 저의 어두운 마음의 부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당시 제 마음 속엔 정말 학교를 그만두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었지요.
남들이 보기엔 잘 적응하면서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학교 생활이 제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하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학교 분위기는 ‘좀 살벌했다고 해야 하나‘ 중학교 시절에는 있을 수 없는 싸움이 교실에서도 자주 있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실제 문제는 세상이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제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가야 하는지 모른 채 헤매고 있다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저는 문과가 맞다고 나름 생각했었는데 아버지의 강권으로 결국 이과 공부를 했었고 결국 대학도 이공계로 갔었지요. 4학년 1학기까지 대학에서 미적거리다가 카투사로 미군 군대에 갔었는데 군대 자체가 저에겐 정말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피난처였었고 또한 저의 미래에 대한 결단을 내린 시기이기도 했지요.
사실 고등학생이었을 때 학교 카운셀링 선생님을 몰래 찾아가 카운셀링을 여러 차례 받아보았지만 카운셀링에도 답이 없다는 생각에 나중엔 “선생님, 이제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한 후 모든 것을 스스로 무마시키기도 했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저의 전공에 맞춰 보겠다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지만 하면 할수록 ‘이것은 나의 답이 아니다’라는 답만 마주하다가 군대에 갔던 것이고요.
이와 같은 상황이었음에도 철저히 나의 마음을 숨겼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말한다고 해서 답이 있다고 생각지도 않았고 또한 가난한 살림에 정말 온 힘을 다해 저희 형제들을 공부시키셨기에 자칫 걱정만 끼쳐드린다는 생각에 그랬었지요. 설상가상으로 고3 때에 허리를 다쳐 당시 대학입학 성적에 큰 비중이 되는 체력장시험을 받을 당시 넓이 뛰기, 윗몸 일으키기 등 허리를 써야 하는 종목을 사실상 못해 체력장 점수가 참가하기만 해도 나오는 16점이 나왔었지요. 이를 가족에게 끝까지 숨겼었습니다.
다행히 군대 이후 과감히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바꾼 이후로 풀리기 시작했기에 그때 그 시절의 통증을 나만의 성장통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애경님의 시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 보니, 저만 지우고 싶었던 시절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더 암흑과도 같은 시절을 보냈었겠다’란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사실 저의 경우, 이미 주어진 환경 속에서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제가 현재 심리상담이나 진로상담도 하고 있기에 저의 성향이 딱 그러기 좋은 성향임을 발견했었고, 제가 대학에 다녔던 공학계열은 저의 성향상 정말 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음을 발견했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아이의 성향이 저와 거의 유사하더군요. 섬세하면서도 통찰 융통성이 높은 성향을 타고 났는데 저도 그랬지만 이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는 세상을 바라볼 때 몇 겹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추상적이면서 지나치게 많은 생각에 빠질 수 있고, 여백이 없이 지나치게 틀이 강한 집단에서는 이것이 몸에 맞지 않아 몸부림치다 스스로 고립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들 역시 그러한 성향 속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더군다나 큰아이를 더욱 힘들게 하는데 일조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성향일수록 좀 더 숨통을 틔워 주고 기다려 주며 아이가 원하는 범주에서만 조언해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해야 하는데, 저는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혼돈 속에서 지나왔다면, 큰 아이에겐 제가 오히려 아이의 숨통을 죄는 역할을 그 당시에 했다는 것이지요.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른다’는 말과 함께 그 당시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그 본질을 모른 채 지나치게 경제적인 부분에 매몰되었던 결과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돈은 제법 벌었지만 가족은 망가진 것이지요.
이애경님의 시는 그러한 시절 어디에 머무를 곳 없어 방황하고, 아빠에 대해 학교에 대해 세상에 대해 반항해야 했었으며, 그 내면엔 밝고 청량감이 전혀 없고 썩은 사과 같은 것들이 가득 차 막히고 어두운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아이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애경님은 시에서 ‘내가 옆에 있을게’라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어디 머물지 못하고 멀리 방황할 때에 그 아이를 ‘그리움’으로, 아이가 반항의 외길을 타고 있을 때 ‘기다림’으로, 아이의 마음이 사방이 막히고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언젠가 아이가 이것을 이겨내고 마음이 환해 질 것이라는 ‘파아란 꿈’을 놓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시는 결국 아이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하고 그 마음의 감정을 읽어주며 공감하는 엄마 이애경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 서른이 넘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잘 개척하고 있는 큰아이.
그럼에도 지금 큰아이를 볼 때마다 더욱 애틋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그 당시 나의 잘못에 대한 미안함과, 큰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고 함께 해주었던 엄마를 잃은 상실의 감정이 누구보다 클 것인데, 아무 내색 없이 밝게 제 얼굴을 봐 주는 그 모습이 어쩌면 제가 청년기 때 제 마음을 숨기고 아닌 척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큰아이가 이애경님이 돌아가시기 전 해에, 자비로 엄마가 가고 싶어 했던 프랑스를 함께 여행해 주어 엄마의 소원을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름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직도 남아 있을 아이의 어린 시절 상처,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잘 정리되고 정돈되어 모두 다 녹아 없어지길 제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