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44번째 선물, 시 ‘보리’입니다. 보리는 다른 작물과는 달리 가을에 심고 한겨울을 나는 과정을 거쳐 알곡을 맺지요. 이애경님은 이러한 보리에 대해 무엇을 느끼고 시와 글을 썼을까요? 이를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보리
살을 에는 추위
땅 속 음습한 곳에서딱딱한 껍질 벗겨 내고
싹을 틔워
보리가 자란다.내 슬픔도 익어간다.
아프다 시리다 할 때마다
너를 향한
내 좌절이 알알이 맺혀 간다
눈물겹도록 겹겹이
피를 타고 전해지는 수액이
고통을 딛고 속 채워 간다.이렇게 아픈 걸 보니
통증이라는 결실도
보리 속에
함께 맺혀 가나보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라나는 보리를 생각하니, 마치 나의 겨울에 큰 힘이 되는 것 같아 적어보았습니다.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하여 듣다 보면 비록 어설플지라도 손끝으로 표현되어 청자에게 전달되겠지요.
그런데 내 안의 감정을 진실되게 표현하려 할 때 가장 듣고 싶어하는 청자는 바로 자기자신임을 발견하게 되네요.
고난이라는 추운 환경 속에서도 견디어 내고 싹을 틔우고 열매 맺길 소망하는 화자…
그 시적 화자를 보리에 비유하여 표현해보았습니다.
봄 햇살이 우리의 볼을 간지럼 피우며 말 걸어 오는 오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느끼고 고민하므로 조각난 감정과 생각들이 통합되어가는 날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애경님의 시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이전 글 ‘봄날은 간다’를 읽었을 때 봄이란 계절은 모든 것이 새롭게 탄생하는 계절처럼 느꼈고, 이를 바라볼 땐 세상 어디에도 근심이나 고난 따위가 전혀 없어 마음이 환해지고 뭔가 힘이 막 나는 느낌이 들었는데, 보리라는 시를 읽으니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군요.
보리는 우리 나라의 경우 가을에 씨를 뿌리고 겨울을 지낸 후 늦봄이나 초여름에 수확하는 작물에 해당됩니다.
이애경님과 제가 이전에 살았던 충청도 어느 지역 겨울에, 집 인근의 논밭길을 따라 걷곤 했었는데 그때 능선에 있는 어느 밭을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었습니다. 그 지역의 모든 논밭들이 꽁꽁 얼어붙어 있고 모든 곳이 황토색으로 뒤덮여 있건만 그 곳만은 푸르렀기에, 겨울 보리를 처음 보았던 저와 이애경님에겐 참 경이로웠습니다.
겨울의 대부분의 식물들은 개구리가 겨울잠 자듯 몸을 움추리고 한 겨울엔 얼어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지상과제인양 하고 있는데 유독 보리만은 겨울의 악조건을 헤쳐내고 성장과 결실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이애경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
땅 속 음습한 곳에서딱딱한 껍질 벗겨 내고
싹을 틔워
보리가 자란다.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려면 먼저 씨앗의 딱딱한 껍질을 버려야만 합니다.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지요. 자칫 얼어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보리의 씨앗은 이를 감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좌절을 맛보고 이 좌절을 이겨내고 하는 순간들이 연속될 것입니다.
이애경님은 이러한 보리의 시련을 목격하면서 여기에 자신을 대입합니다.
아프다 시리다 할 때마다
너를 향한
내 좌절이 알알이 맺혀 간다
눈물겹도록 겹겹이
피를 타고 전해지는 수액이
고통을 딛고 속 채워 간다.
인간들 중에는 좌절을 맛보며 고된 시련을 당할 때, 결국 그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몸은 살아있으나 마음이 죽어간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애경님도 그런 인간 중의 한 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를 잘 살펴보면 이애경님이 ‘나는 달라. 나는 충분히 이런 시련쯤은 이겨낼 수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구절은 그야말로 시련 속에서 힘들어 하는 이애경님 자신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애경님은 왜 이 시를 썼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애경님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라나는 보리를 생각하니, 마치 나의 겨울에 큰 힘이 되는 것 같아 적어보았습니다.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하여 듣다 보면 비록 어설플지라도 손끝으로 표현되어 청자에게 전달되겠지요.
위의 글을 정리해 보면, 이애경님은 보리가 혹독한 겨울에도 성장하는 것을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시련의 연속이자 좌절과 좌절의 연속임에도 보리는 오히려 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애경님은 자신을 보리에 대입해 봅니다.
시련 속에서 자신이 아우성하듯 보리도 그렇게 아우성함을, 그럼에도 보리가 이를 이겨내듯 자신도 이겨내는 모습이 그려진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시와 글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음이 이 시와 글을 읽는 청자에게 전달됩니다. 그 청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애경님이 시와 글을 쓴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의지는 어떻게 생기는 걸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지를 북돋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 구호를 외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나는 잘 할 수 있어. 나는 이겨낼 수 있어’와 같은 방식이지요.
그런데 이 방법은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할 수 있어, 이겨낼 수 있어’와 같은 구호는 인간 내면의 생각과 느낌 중 느낌 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느낌은 자칫하면 자신의 무의식적인 느낌과 서로 상충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의식적인 ‘나는 잘 할 수 있어’와 무의식적인 ‘나는 결국 실패하고 말거야’와 같은 심리가 서로 부딪히면서 크게 갈등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많은 심리적 에너지가 소모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 중 ‘느낌과 생각’ 모두를 정밀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자신의 느낌 속에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느낌 모두를 직접 마주하면서 이를 체계적이고 깊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잘할 수 있어’란 느낌에 대해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지?’란 방법을 찾아보게 되며, ‘나는 결국 실패하고 말거야’란 느낌엔 ‘왜 자꾸 이런 느낌이 들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구호는 이러한 질문을 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마음만 푸쉬(push)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느낌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며 그 답을 찾아가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 이애경님은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픈 걸 보니
통증이라는 결실도
보리 속에
함께 맺혀 가나보다…
이애경님은 ‘나는 왜 이리 좌절하며 아파할까?’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보리가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 알곡을 맺듯이 나 역시 결실을 맺으려고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는 거야’라고 스스로 답을 찾아갔던 것이지요.
이애경님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자신을 스스로 응원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자신의 시와 글을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오픈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보리와 같이 자신의 시련을 이겨내길 응원하기 위해서라고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