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22: 시 발열

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22번째 시, ‘발열’입니다. 발열이란 ‘열이 외부로 드러나게 발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애경님은 발열과 관련 자신이 아플 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플 때 나는 열, 그 열 중엔 어떤 열이 있을까요?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발열

이애경의 발열

 

몸 깊숙한 곳에서
열이 오른다
스물스물

기억 저편에
외면당했던 추억의 조각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열꽃으로 피어난다

차라리 그 때
‘아프다’고 말했더라면..

어설프게라도 그 때
표현했더라면…

마음과 몸이 연결된
터널에서
열이 덜 오를텐데 

 부슬부슬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네요. 

며칠 전.. 갑작스런 병상의 소식을 접하고 지인의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그토록 무더웠던 여름동안 지독한 외로움 속에 홀로 아파했을 지인의 마음에 머무릅니다.

가족 가운데 한 명의 아픔은 온 가족의 아픔을 뜻하기에 배우자와 자녀는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가 될까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부인의 이야기.. 

어쩌면 우리에게도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면..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요?.. 세상의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면.. 무엇을 남기고 가면 좋을까요?..

아무쪼록 다시 회복의 기회가 주어져 남은 여행길, 꽃 하나 더 피워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이애경과 나

 

이애경님의 시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시를 읽어보니 이애경님 자신이 아플 때 일어난 몸과 마음의 이야기를 했다면, 글은 이 시와는 관계없이 중한 병에 걸린 분을 병문안 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글의 공통점이라면 ‘아픔’을 소재로 했다는 것이네요.

솔직히 글보다는 시에 온 마음이 다가갔습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시를 살펴보면, 이애경님은 이전에 자신이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 결과, 현재 아플 때 ‘마음과 몸이 연결된 터널에서 열이 덜 오를텐데…’라고 했습니다. 즉 이 말은 ‘현재 몸의 아픔으로 발생한 열과 이전에 아프다고 말하지 못함으로 온 마음의 열이 합쳐져 훨씬 더 높은 열이 오르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전에 아프다고 표현했다면 지금 조금만 아파도 될 것을, 그렇지 않아 지금 많이 아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각과 감정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먼저 신체 감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즉 몸의 어느 감각기관에 ‘아프다’란 자극이 온 것이지요. 이러한 자극이 오면 ‘감정’이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이나 슬픔 등 어떤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아프다’고 말을 해서 치료를 빨리 받으면, 질병이 점차 사라지므로 몸의 감각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면서 감정도 빠르게 가라앉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부모님의 보살핌과 같은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인정자극인 ‘애정’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이때 ‘아팠다’라는 고통에서 오는 나쁜 느낌보다는 좋은 느낌이 더 남게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이 발생할 때 생물학적 현상인 뇌의 신경전달물질 분비되어 해당 감정을 분명하게 느끼게 한다면, 느낌은 감정이 가라앉을 때 또는 그 후에 따라옵니다. 이때 느낌의 역할은 자신의 정신적 경험과 관련되며 ‘심리적 해석’을 합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팠을 때 부모님이 나를 잘 보살펴 주어서 잘 나았어. 그래서 참 부모님이 참 고맙고 좋아’와 같이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자신이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감각은 계속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이때 감정도 그 고통에 비례하여 더욱 고조되었을 것이며, 그로 인한 정신적 경험은 부정적이 되었을 것이며, 따라오는 느낌은 안 좋은 쪽으로 심리적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언젠가 매우 아프다 죽을지도 몰라.’

이러한 느낌이 만들어낸 ‘심리적 해석’은 다음에 아플 때 생기는 또 다른 열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애경님은 ‘열꽃’이라고 표현했었고 이러한 열꽃이 생기지 않았다면 ‘열이 덜 오를텐데’라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은 자신이 아픈데 왜 아프다고 말하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이애경님의 경우는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 ‘착한 어른아이’가 작동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착한 어른아이가 작동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희생’이란 심리도식이 만들어지고 작동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희생이란 심리도식이 만들어진 사람들은 정말로 많이 아플 때 아프다고 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 내색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속성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제프리 영의 ‘심리도식치료’를 심리상담 선생님들께 강의를 할 때마다, 이애경님도 제 강의를 매번 참여했었는데, 그때 자신이 ‘자기희생’이란 심리도식이 높음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특히 이 심리도식은 기질적으로 ‘수용성’이 높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착한 어른아이’가 형성되면 대단히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애경님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사실 이 글을 읽으면서 제일 처음 떠오른 것은, 제가 아플 때 이애경님이 저를 병간호하던 장면들이었습니다. 제가 수술을 받고 한 열흘동안 병원에 입원했을 때, 너무나 당연한 듯이 병원의 간이침대에서 저를 병간호하는 모습, 그래서 제가 ‘굳이 자기가 없어도 될 것 같아. 자기도 피곤하니 집에서 푹 쉬고 와’라고 여러 차례 권했었고 그제야 마지못해 집에 갔었지요. 또 다른 질병으로 사흘간 병원에 입원했을 땐 아예 사흘 내내 옆에 붙어 있었지요.

사실 저야 이애경님의 지극정성이 매우 좋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수고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요. 병원 시스템이 매우 좋으니까요.

솔직하게 고백하면, 저는 이애경님의 그러한 희생의 덕을 많아 보았습니다. 병간호 해줬던 그 때에도 내심 무척 좋았으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저를 위해 저당식 음식은 물론 제 입맛에 맞는 빵을 개발하여 매일 제공하므로 제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었지요.

이젠 그녀가 없으니 그런 대접은 영영 불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아마도 천국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발열’이란 시와 같이 ‘자신이 너무 희생하고 살았구나, 좀 더 자신을 돌보면서 살아도 되었을텐데…’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하루 세끼를 혼자 준비하고 혼자 먹고 혼자 치웠습니다. 아마도 이애경님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나 없어도 잘 하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도 그땐 모른 체 했던 나, 참 미안하고 죄송하고 고마움에 마음이 미어지네요. ‘미안하고 죄송하고 고맙다’란 말을 하늘을 향해 해 주고 싶네요.

‘이젠 그곳에서 편히 쉬길 바란다’는 말도 함께 말입니다.

 

이애경과 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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