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의 열아홉번째 선물, 시 ‘바닷가 작은 집’입니다. 마음을 아련하게 하는 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심리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애경님은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바닷가 작은 집
바닷가 작은 집
아버지는 고기 잡으러
엄마는 그물 기우러
간 사이네 살 아기가
두 살 아기를
긴 기저귀로
돌돌 감아 업고파도랑 갈매기
친구 되어 놀다가
엄마 돌아오시는
어스름한 해질녘따스한 눈길 먹고서야
두 아기는
곤히 잠이 듭니다
가장 어린 시절… 어떤 장면들이 떠오르시나요?
저의 가장 어린 시절의 장면을 떠올려 보면 이 장면이 늘 떠오르곤 합니다. 엄마 아빠는 일터로 가고 안 계시고, 두 살 터울 아래의 동생을 업고 아기가 아기를 돌보며 마냥 기다려야 했던 어린 시절…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 어린 누나 아기는 남동생 아기를 어떻게 돌볼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에 젖어봅니다.
부모로부터 충분한 돌봄을 받았어야만 했던 네 살인 나는 동생을 돌보며 생존해야만 했고 감정표현을 충분히 지지 받지 못하며 발달과정상의 기본 욕구가 채워지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아동기의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보살핌을 그 어느 시기보다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기본 욕구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특별한 소중함으로부터 거부당하고 버림받음은 존재의 내면에 핵으로 자리 잡아 수치심을 이루게 됩니다.
죄책감이 어느 한 행위에 대한 잘못이라면,
수치심은 존재 자체에 대한 잘못… 거절감…
그래서 게르쉔 카우프만은, 수치심은 ‘내면에서 느끼는 상처로서 자기자신과 타인 모두에게서 분리시키는 영혼의 병으로서 치명적인 상흔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달픈 삶을 살아내야만 했던 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작은 향기 자녀의 목에 걸어주시고 평생을 살아오신 우리들의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애경님의 위의 시를 발견하고 읽었을 때, 그녀가 결혼한 지 20 여년이 지난 이후에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하곤 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부분 부분 했었기에 이애경님의 어린 시절 성장과정을 모두 꿰어 맞추는 데는 시간이 걸렸었지요.
태어나서 엄마 손에 키워졌다가 엄마가 아팠기에 외할머니 손에 키워졌었지만, 외할머니도 순탄치 않은 삶을 마감하므로 다시 엄마에게 돌아온 후 그때 태어났었던 동생을 돌보는 것이 그녀의 과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이 한 없이 좋았다고 합니다. 태생적으로 ‘수용성’이 높은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엄마가 일터를 가야하니 아기를 맡을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어린 이애경은 두말없이 자신이 맡겠다고 했겠지요.
어린 이애경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것을 한다는 것은 엄마에게 관심받을 수 있고 칭찬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그 내면을 더 깊게 들어가면 이제 엄마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어린 시절에 이미 두 차례나 이별의 경험을 했었기에 그 마음엔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깊게 자리잡혔던 것이지요.
이애경님이 저에게 전했던 이야기 중엔, 바로 위의 나이 때 아빠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매달아 심하게 때렸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또한 그 어린 아이가 울면서 엄마에게 살려 달라고 눈길을 그렇게 주었을 때 엄마가 자신의 눈길을 외면하더라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애경님은 그 시절 아빠의 학대는 그녀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았으며, 엄마의 외면은 자신에게 고통과 외로움으로 강하게 뇌리에 새겨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초등학생 때 세수하다 아버지에게 뺨 맞았던 것이 평생 생생히 기억났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 장면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큰 장애물이 되었었는데, 어린 꼬맹이가 학대 받고 외면 받고 했던 것이, 어른이 되어선 부모님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것으로 많이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이애경님은 ‘수치심’이란 단어로 정리했더군요. 그녀는 게르쉔 카우프만이 정의한,
수치심은 내면에서 느끼는 상처로서
자기자신과 타인 모두에게서 분리시키는 영혼의 병으로서
치명적인 상흔을 남긴다
라고 했습니다.
수치심을 감정으로 표현할 때에 이 감정은 슬픔과 분노와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복합화된 매우 복잡한 감정으로서 특히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킬가봐, 타인의 시선에 매우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수치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되며, 타인과의 관계도 스스로 일정 거리를 두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애경님은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라나야 할 어린 아이가 그렇지 못할 때 그 내면의 핵엔 수치심이 자리잡힐 수 있다’라고 말했지요.
사회심리발달 8단계로 유명한 에릭 에릭슨도 탄생에서 18개월의 생애1단계는 ‘신뢰감이냐 불신감이냐’의 심리적 선택의 과제가 있다면 18개월에서 3세에는 생애2단계로서 ‘자율성이냐 수치심이냐’의 과제에 놓인다고 했었습니다. 부모에게 애정을 듬뿍 받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면서 자란 아이는 세상을 바라볼 때 긍정적인 ‘신뢰감’의 틀이 생겨나며, 여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때 신뢰감의 틀에 자율성의 틀이 더 장착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이와 반대 방향으로 심리의 틀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애경님은 어린 시절 내면적으로 큰 투쟁을 겪으셨던 것 같습니다. 네 살 어린 아이가 두 살 동생을 업는 모습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버림받지 않으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녀가 ‘착한 어른 아이’라는 페르조나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기 땐 아기를 외할머니에 맡기고 이젠 어린 동생까지 맡겼던 엄마가 이젠 그 아이의 슬픈 눈길을 외면해야 했던 엄마에겐 크나큰 죄책감이 들어섰겠지요. 그래서 엄마와 딸의 관계가 아주 가까이 가고 싶어도 그렇지 못하고 맴돈 이유가 바로 ‘딸의 수치심과 엄마의 죄책감’이 서로에게 가까이 가다가 멈춰 버리게 하는 심리의 근원이었을 가능성이 있겠지요.
만약 “엄마, 왜 그때 저의 눈길을 외면했어요?”란 질문을, “정말 미안하구나. 나도 그게 한이었어…”라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눴더라면, ‘그녀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애경님과 집 혹은 길가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이애경님이 자주 동생의 전화를 받곤 하는 장면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이애경님은 동생에 대해 참 많은 애정과 함께 걱정을 했었지요. 자신과는 조금은 다르겠지만 유사한 성장과정을 밟아왔기에 혹시 ‘동생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힘든 과정을 지나오고 있지 않나’란 마음이 있었지요. 그 마음을 알기에 그들의 통화를 묵묵히 지켜보곤 했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 했던 건 다 너 잘 되라고 한 거야.” 그러나 이런 말은 자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이애경님이 이 글을 쓴 이유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감정을 되짚으며,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이뤄지지 못했던 대화와 치유의 가능성을 글로써 전하려 했던 것 아닐까요? 자신의 글을 통해 부모들이 자녀의 마음을 보듬고, 혹시 있을 수치심이라는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얻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그녀라면 충분히 그러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