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17: 시 바다 우린 차

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열일곱번째 선물, 시 ‘바다 우린 차’입니다. 이 시를 보니 지금까지 보아왔던 시와는 달리 매우 역동적인 느낌이 물씬하네요. 이애경님과 바다와의 만남. 과연 이애경님의 ‘바다를 우린 차’란 어떤 차일지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바다

이애경의 바다 우린 차

긴 그리움으로
꼬박 기다리다
만난 바다에
내 부서진 청춘 맡긴다

파도로 춤을 추고
은빛 포말 날개 되어
날아 오른다

이미 흐려진 나를
감싸고
바다 위를 누빈다

뭍에서 찢긴 흉터와 어지러움
아픔과 곤고함 훌훌 벗어버리라고
파도는 내게
하나 되어 날아오르자
속삭인다

타오르는 분노
바닷물로 씻기고
파도로 싸매고
포말로
위로해준다

다시 너를 만날 때
미처 하지 못한 말
하고 오리라
그 사랑
바다 향 담아 우린 차로
벗들에게 전하겠노라고

 

청년의 시절을 이제 돌아보니 “참 많이 아팠구나.”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태내기에서부터 영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전생애 발달단계에서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지.. 또 어떤 모습으로 가고 있는지.. 좀 더 선명히 볼 수 있다면 인정받고 싶은 노력들은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극에서 막이 오르면 배우가 특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쓰는 것이 가면인데 이것을 ‘페르조나(persona)’라고 합니다. 성격, 인격, 개성 등을 뜻하는 ‘personality’라는 어원에서 파생하였지요.

자신의 내면과 외부 사이에 기능적 인격을 연결하는 ‘페르조나’는 역할들을 수행하면서 성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요.

나의 내면에서 느끼는 순수한 감정을 의식하기 보다 맡은 역할을 의식하는 경우가 더 많아질 때 내면과 외면의 관계는 언제부턴가 두터운 벽이 생기고 소통의 부재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지나간 시절의 자기에게 또는 현재의 자기에게 시와 이야기를 함께 담아 아낌없는 지지와 격려로 공감의 글 남긴다면 작지만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여수 바다

 

 

이애경님의 시를 살펴보니, 그녀가 쓴 어떤 시보다 감정의 억제나 행동의 제약없이 있는 그대로 자유로운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듯 하는군요. 또한 그녀의 글 첫 이야기가 태내기에서 전생애 발달단계를 거론한 것을 보니 한편으로 참 애틋한 느낌이 드는군요. 이 글을 사망하기 몇 년 전에 썼었는데, “인생 중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 란 저의 질문에 “지금”이라고 대답했었지요. 이 글을 보니 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참으로 진심이었구나’란 느낌이 절로 들더군요. 

시의 첫 머리에서 이애경님은 ‘긴 그리움으로 꼬박 기다리다 만난 바다에  내 부서진 청춘 맡긴다’ 라고 표현했군요.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그 바다를 만난다고 하면서 그 바다에게 ‘내 부서진 청춘 맡긴다’라고 했네요. 자신의 바다를 보면서 자신의 힘들었던 청춘을 보상 받음을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태어난 곳이 포항 앞바다 쪽이었고 자라온 곳이 주문진이었기에 바다를 항상 보고 자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시 전체를 보면, 그저 관망하는 바다가 아니라 마치 물 속에 뛰어 들어가 거침없이 뛰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그녀가 바닷가 근처에 살았을지라도 바다에서 수영을 하거나 바다를 벗으로 해서 즐기지는 못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사연을 들어보니, 자녀들이 바닷가에 가는 것을 부모님들이 막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바다의 사나이이자 해녀라고 보아도 될 만큼 수영을 잘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낳은 자녀 중 하나를 어린 시절에 잃은 이후부턴 자녀들을 절대 위험한 곳에 보내지도 가까이 하지도 못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저와 결혼하고 제가 워낙 바다를 좋아하고 잘 들어갔기에 그때부터 여름이면 바다에서 저에게 수영도 배우고 튜브를 타며 바다를 즐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막연한 동경의 바다에서 이젠 좀 더 친근해지며 자신의 막연한 답답함을 털어내는 바다로 전환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글을 보면, 생애발달단계의 이야기에서 바로 ‘페르조나’ 즉 잘하기 위해 써야 하는 사회적 가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전의 글에서 자신의 페르조나를 ‘나는 옳고 선하다’로 주장되는 페르조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시의 내용에서 보듯이 ‘매우 자유로운 어린이’가 내면에서 숨겨져 있었는데, 이러한 엄숙하고 긴장되는 페르조나가 항상 자리를 잡고 살았으니 이 또한 그녀를 답답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페르조나와 관련 ‘자신의 내면과 외부 사이에 기능적 인격을 연결하는 페르조나’라고 언급했습니다. 나의 내면 즉 내 안에서 작동되는 ‘나의 생각과 느낌’이 있으며 이를 외부로 표출함으로 나란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데, 페르조나는 이를 좀 더 잘 포장해서 표현하는 역할을 함으로 그럴듯한 인격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의 내면에서 느끼는 순수한 감정을 의식하기 보다, 맡은 역할을 의식하는 경우가 더 많아질 때, 내면과 외면의 관계는 언제부턴가 두터운 벽이 생기고 소통의 부재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즉 자신의 내면의 생각과 느낌이 언젠가부터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막혔다는 것이며, 그 이유가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 ‘맡은 역할’을 더욱 의식하고 그 역할에 맡겨진 행동만을 외부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실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차단하고 살았으니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로 인한 심리적 어려움이 매우 높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페르조나가 자신의 내면의 생각과 느낌을 지나치게 억제시키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했다는 것이지요.

이 글을 보니 그녀가 자신의 심리를 스스로 진단하였을 때, 첫 단계는 이전의 글에서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림자들을 바라보고 그 그림자 속에 갇혀 있는 어린 자기, 그 어린 자기의 울음소리를 포용하였다면, 이제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의 페르조나 속에 갇혀 있었던 자신의 어른 아이를 포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애경님은 이전의 시 ‘그림’에서는 자신의 그림자와 관련된 어린 자기를, 이번 시 ‘바다 우린 차’에서는 자신의 페르조나인 어른 아이를 바라보고 이들로부터 자신을 회복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네요. 이것은 인간의 인간 심리의 커다란 두 문제를 많이 해소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를 칼 융은 ‘자기 실현’이라고 했었고 에릭 번은 ‘심리적 자율성 획득’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이것은 비로소 ‘심리적 자유함’을 맞이함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 시를 쓴 이후 이애경님은 가정에서도 마치 깜찍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너무 천연스럽게 보이곤 했었는데 그 이유를 비로소 저도 이해할 수 있겠네요.

이애경님의 시 말미에 ‘그 사랑, 바다 향 담아 우린 차로 벗들에게 전하겠노라고’ 고 표현한 것은 그녀의 내면에 갇혀 숨겨져 있던 그녀의 웅장함과 역동성,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스러움 등을 포함한 자신의 심리적 자유함을 전하고 싶음을 표현한 것임을 느끼게 되는군요.

 

이애경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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