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21: 시 무언의 감사기도

이 글은 이애경님의 21번째 선물, 시 ‘무언의 감사기도’입니다. 또한 이애경님은 시를 보충하는 글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 것 같습니다. 정말 이애경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과 그림

이애경의 무언의 감사기도

 

가을이 저만치 손 내미는
여름 끝자락

갑작스런 불청객으로
온 몸 멈추고
구급차에 실려
눈물로 실려가던 날

고통의 절차 거쳐
마음 가라앉히고 보니
더위 마다 않고
달려온 깊은 사랑에
눈시울 젖어드는 밤

무언의 감사기도 올리니
귀뚜라미 여치
작은 풀벌레마저도
잠잠히 잠들어간다
나도 따라 잠든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들은 쉼 없이 달려오게 하였고 마침내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이 나의 몸을 정지시켰던 어느 해 여름 끝자락이 생각납니다.

온 몸이 멈추니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들…

몸의 감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나를 붙잡고 있었던 신념들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니 내가 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나를 엄습하여 행동과 감정이 조절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결국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

그러니까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지속해야만 하는 일종의 ‘숨은 중독의 유형’을 갖고 있었네요.

나에게 있는 중독적 성향은 무엇이 있을까… 돌아보며 좀 더 ‘자유’를 만끽하는 가을 수채화가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이애경과 교회

 

이애경님의 시를 먼저 읽어보았을 때, 제 머리에서도 이 시와 관련된 한 사건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대략 2000년대 중후반의 어느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저도 모르는 사이, 구급차에 실려 종합병원 응급실에 실려간 것이지요.

시에 나와 있듯이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새벽이 지난 이른 아침, 저에게 낯선 전화가 와서 그 전화를 받았더니 이애경님이 응급실에 실려왔으니 보호자가 병원에 빨리 와 달라는 전화였지요. 황망한 마음에 급히 그 병원에 가서 자초지종을 들었는데,

그 당시 매일 새벽기도를 갔었던 이애경님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하고 119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해 왔다는 것과, 병원측에서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결국 병원에 입원해서 종합검진과 치료를 받았던 것이지요.

검진결과는 뇌 속에 뇌전증상이 있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약물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했었지요. 그 이후 퇴원해서 오랫동안 병원이 주는 약을 먹었었는데 그 약이 자신을 너무 무력하게 한다고 해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복용했었고 5년 후인가 다시 재검을 받았을 때 ‘완치’가 되었음을 통보 받았었지요.

이애경님은 그 날 이후 새벽기도 다니는 것을 중지하였고, 언제부터인가 새벽에 집에서 혼자 어느 교회에서 매일 새벽에 올리는 말씀을 프린트하여 그 글을 읽으며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는 방식으로 대체를 했으며, 사망한 날 그 날 새벽까지도 그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시에 나와 있듯이, 당시 이애경님의 소식을 전해 들은 교회분들이 많이 찾아왔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인 ‘무언의 감사기도’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을 통해 깊이 위로 받음과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셨기에 살아났음’에 대한 감사의 기도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 아래의 짧은 글은 당시에 함께 쓴 것이 아니라 세월이 10여 년이 더 지난 후에 보충한 글입니다. 

이애경님이 10여 년이 지난 후 이 시를 찾아 다시 대했을 때, 그녀가 자신의 내면의 그 무엇을 깊이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애경님은 그 당시 자신이 그러한 증상이 일어났던 것과 관련,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몸의 감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나를 붙잡고 있었던 신념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중간 대답으로 ‘내면에 숨어 있었던 불안이 행동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채 멈추지 못하게 했음’을 말하며, 그로 인해 강박적으로 멈추지 못하게 된 것이 일종의 ‘중독’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애경님의 시와 글을 통해 많은 감회와 생각에 젖어들었을 때, 계속 머리에 떠오른 것은 ’10년이 지난 이후 즉, 그녀가 심리공부를 한 이후에 그 당시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서재에 있었던 한 권의 책이 떠오르더군요. 바로 ‘스티븐 아터번과 잭 펠톤’이 쓴 ‘해로운 신앙이었습니다. 부제목은 ‘종교 중독과 영적 학대의 치유’이지요.

돌이켜 보면,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다니던 당시의 그녀는 심신이 매우 지친 상태였습니다. 당시 제가 부업으로 했던 공부방이 규모가 커져 이애경님도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해야 했었으며, 이보다 더욱 그녀의 마음을 지치게 했던 것은 병중에 있었던 엄마가 더 이상 바늘을 찌를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랜 투석으로 치료가 힘들었던 상황이었는데, 새벽마다 ‘엄마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를 하며 더욱 지쳐갔던 것이지요. 

하지만 엄마는 얼마 못되어 돌아가셨고 이애경님은 그 과정에서 질병을 얻었으며, 길가에 쓰러져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마비되는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것이지요. 다행히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를 했으니 그 위로가 그나마 그녀의 마음을 평안하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10년이 지난 이후, 그녀는 자신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본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신앙의 모습이 믿음이 아닌 자신의 상황이 만들어낸 잘못된 신념이었으며 이러한 신념이 자신을 ‘구복 신앙’과 같은 중독에 빠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책에서 해로운 신앙의 여러 가지 형태들 중에 ‘강박적인 종교행위’ ‘자기 강박’이란 것이 있으며, 해로운 믿음의 21가지 유형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내가 하는 행위에 달려 있다’‘만약 내가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된다면, 하나님은 나를 혹은 내가 기도하는 사람을 치유해주실 것이다’, ‘나는 행위로 천국에 갈 수 있다’란 내용이 있는데, 이애경님이 이 부분에 빽빽하게 줄을 긋고 글을 써 놓은 것을 보면, 이 내용들이 당시의 자신을 돌아보게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와 제가 자주 나눴던 이야기 중엔 ‘신앙과 심리의 조화’가 있었습니다. 신앙이 자칫 왜곡되고 해로운 신앙으로 변모 되었으나 그것을 참된 신앙으로 오해하는 이유 중에는 자신의 자라온 환경이나 힘든 상황 등으로 생긴 심리가 한몫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자칫 믿음이 아닌 자기 신념으로 굳어갈 수도 있음을 역설했던 그녀, 그것은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임을 이 글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마다 중독의 유형도 다르고 특히 신앙인들의 해로운 믿음의 형태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이애경님은 자신의 연약했던 그러한 부분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언어 방식으로 이 글을 남긴 것은 자신이 가졌었던 중독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됨’을, 다른 분들도 자신과 같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이애경과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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