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37번째 선물, 시 ‘돌바위 깨뜨리던 날’입니다. 이애경님이 말하는 돌바위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혹시 우리도 우리의 돌바위를 깨뜨려야 하지 않는지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돌바위 깨뜨리던 날
첩첩 산 중에만
있는 줄 알았던 돌바위는
달그림자 따라
몸속으로 들어와
자리 틀고 앉아
장사진을 이룬 지
몇 해던가칼날 같은 바람 불면
유난히 신경 타고
온 몸 휘감는 통증 탓에당장이라도 산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지만
이런 저런 우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지
몇 날 며칠 밤이었던가새벽별 속삭이고 귀띔해준
어느 이른 아침
큰 마음 먹고 돌바위 깨뜨려
흐르는 조류에 떠나보내던 날상처입고 떠난 아들
용기 내어 부르니
어느새 가슴으로 들어와
힘없는 내 손
꼬옥 잡아 주었네.
오늘은 아버지인 지인과 아들이 화해하는 이야기를 은유와 상징을 통해 표현해보았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 기나긴 세월동안 아픔과 상처로 뿌리내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이어져 아버지는 큰 수술을 하게 되면서 아들에게 전화할 용기를 내었으며,
아들도 영원히 미워할 것만 같았던 아버지에 대하여.. 이런 저런 생각에 어찌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서성이던 차에 아버지의 전화 한 통화에 병원으로 달려가 드디어 화해를 하게 되었지요..
그 과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따뜻해져 갔던 이야기를 나눕니다..
특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역할이 그 어떤 역할보다 중요해져가는 시대를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핵가족, 한 부모 가족, 이혼가족, 재혼가족, 조손가족, 다문화가족,
입양가족, 맞벌이가족, 1인 가족 등..
현대 가족의 급격하고도 다양한 변화로 부모의 역할이 점점 더 어려워 지면서 ‘엄마’가 되는 것과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부모님 살아 계시다면.. 전화 한 통화 잊지 마시구요.
이애경님의 시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보니,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서로 갈등이 심해 오랜 시간 헤어졌다가 아버지가 많이 아픈 후 아들에게 연락하니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찾아가지 못하고 서성이던 아들이 단숨에 찾아가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는 내용이네요.
이 시를 읽었을 때 이애경님께서 지인의 사연을 들은 후 시상이 떠올라 썼다고 했는데 그 지인이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군요. 사실 그가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지요.
심리상담 관련 통계 내용 중 약 75%가 관계의 문제라고 하더군요. 이때 관계란 서로 잘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매우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보통 부부간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 엄마와 딸과의 관계, 형제들간의 관계 등이 주류를 이룬다고 알고 있습니다. 부부 관계를 빼면 서로 피가 섞여 있는 직계 혈족간의 관계인 것이지요. 부부는 0촌이라면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은 1촌이며, 형제 자매끼리는 2촌이 됩니다. 가까운 촌수일수록 서로를 잘 알기에 서로 공유하는 것들도 많고, 상호간의 교류에서 서로 많은 감정들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때론 모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뼈아픈 것들이 될 것입니다.
이애경님의 시, 첫 소절을 살펴보니 그 내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첩첩 산 중에만
있는 줄 알았던 돌바위는
달그림자 따라
몸속으로 들어와
자리 틀고 앉아
장사진을 이룬 지
몇 해던가
이애경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 속에 ‘돌바위‘가 몸속에 들어와 자리 틀고 앉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돌바위는 ‘달그림자를 따라’ 들어왔다고 했네요.
여기서 돌바위란 무엇일까요?
‘서로에게 상처를 주어 생긴 마음의 내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아버지가 아들에게 더 아픈 상처를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군요. 아들 역시 아버지 만나는 것이 무섭고 화나고 대화도 안 통하고 하니 찾아뵙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론 일종의 복수가 되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만큼 아버지는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생기는 현상이 저는 ‘딱딱하게 흉터진다’라고 표현합니다. 원래는 마음이 보드라웠는데 거기에 상처가 나고 치유되지 않으니까 상처난 부분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지요. 굳어진 만큼 마음의 작동이 부자연스럽게 되거나 아예 작동되지 않는 부분도 생긴다는 뜻이지요.
두 사람의 경우 서로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란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냉소적으로 되기도 하며 어떨 때는 원망스럽기도 하고 서러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때마다 더 마음이 굳어지면서 ‘다시는 아들을, 아버지를 찾지 않을거야’라는 일종의 신념이 생기고 자신의 이런 생각을 더욱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의 소리를 ‘심리적 메시지’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애경님은 굳이 ‘달그림자 따라‘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표현을 심리용어를 써서 표현한다면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란 말과 의미가 비슷할 것으로 보이는군요.
위의 신념은 그들의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따져본 결과 ‘서로 안 보는 것이 유익하다’라는 객관적 해석을 해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지요. 만약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이와 같이 해석했다면 그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설명 가능하므로 ‘의식적으로’라고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겉은 서로 간 불합리한 갈등이지만 이를 풀지 않고 ‘다시는 안 보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상 본인들도 이것을 원치 않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점차 ‘안 보겠다’로 치닫게 된 것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하면서 설명이야 하겠지만 100% 정확히 설명하지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만큼 그들의 ‘무의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시를 보면,
칼날 같은 바람 불면
유난히 신경 타고
온 몸 휘감는 통증 탓에
당장이라도 산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지만
이런 저런 우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지
몇 날 며칠 밤이었던가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것이지요. 서로 헤어진 후 ‘다시는 안 볼거야’라고 마음 먹었지만 마음이 이상합니다. 이전에 없었던 마음의 현상들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처들이 굳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음의 고통입니다.
이에 대해 가장 이성적이고 좋은 방법은 서로에게 연락해서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를 요청하는 것일 겁니다. 이 내용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진작에 연락해서 “내가 그때 미안했다.”등으로 용서를 구해야 했을 것이며, 아들은 아들대로 “제가 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다”라고 사과와 함께 화해할 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다 알고 있는 답안을 서로 회피하고 있었으며 그 회피하는 마음만큼 이저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 시의 끝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벽별 속삭이고 귀띔해준
어느 이른 아침
큰 마음 먹고 돌바위 깨뜨려
흐르는 조류에 떠나보내던 날
상처입고 떠난 아들
용기 내어 부르니
어느새 가슴으로 들어와
힘없는 내 손
꼬옥 잡아 주었네.
위의 시에서 가장 마음에 다가오는 표현은,
새벽별 속삭이고 귀띔해준
어느 이른 아침
입니다.
이 시구의 주인공 아버지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얼마나 많은 회한을 가졌을까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가슴을 많이 쳤을 것입니다. 일종의 자복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아들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지요. 아들이 왔을 때 아마도 제일 먼저 했을 말이 “내가 잘못했다”였을 겁니다. 이것이 회개인 것이지요.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상대방에게 자복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생각, 행동을 바르게 수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과정이 있어야 용서와 화해가 따르는 진정한 회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저 아버지니까 아들이니까, 유야무야 넘기는 것은 그리 좋지 못한 이야기가 재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류란 말이 심리에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심리적 거래’를 의미합니다. 이때 심리적 거래가 애매모호한 것은 언제든지 이전의 거래방식이 재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해야 하며, 심리적 거래에 대한 계산이 분명한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지요.
이 시를 모두 읽고 이렇게 더 깊게 살펴보니, 제 생각이 나는군요. 저와 제 아들과의 관계.
제가 심리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제가 아들에게 많은 잘못을 행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아들이 참 많은 상처를 받았겠다’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행했던 것은 명절 때 많은 일가족 앞에서, 제가 아들에게 잘못했음을 고백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를 바라보던 아들의 모습은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빠를 이해하고 화해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이었던 아들이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저와 이애경님에게 여행 다녀오시라고 KTX 왕복권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자녀들의 수고와 땀이 담긴 돈을 받는 것이 부담스럽고 미안해서 거절했었는데 그때 아들이 많이 화가 났나 봅니다. 저를 강하게 밀어 넘어졌지요. 그러면서 한 말, “아빤 하나도 변한 게 없어.”였지요.
그 이후 시간이 흐르니 아들의 마음도 치유가 되었나 봅니다. 그후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저를 편하게 대하더군요. 자기 여친과의 고민상담도 꺼내고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 많이 미숙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은 냉소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성적으로 아빠를 용서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내면엔 마음의 앙금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쉽게 말해 인지적으론 치유가 되었지만 정서적으론 아직 치유가 안 된 것이었지요.
그런데 자신의 분노를 저에게 드러내었고 그것을 제가 고스란히 받아주었을 때 그 앙금마저 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들과 저는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아들과의 관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모두 지켜보았던 이애경님, 이 시를 썼을 때 우리집 이야기가 많이 생각났을 듯합니다. 또한 다행히 우리집은 회복되었기에 이 시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