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24번째 선물, 시 ‘다시 가을 오면’입니다. 이 시에는 이애경님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면, 이 시의 깊은 곳에는 이애경님의 무의식적 심리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다시 가을 오면
당신이 스치고 지나간
시선은 깊고 그윽한
향으로 다가와
내 코 끝을
간지럼 피웁니다짙은 핏빛으로 붉게
물든 단풍잎새도온 몸 휘감는
거친 바람 한가운데
따스한 햇살 그리워
살포시 얼굴 내민
코스모스에서도당신과 함께 했던
시름들이 스칩니다곪고 파인
상처의 깊이 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온 당신은고운 꽃잎 되어
수혈해 주었습니다다시 가을 오면
당신의 향으로
이 밤 가득 메우겠지요
가을이 오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그리운 사람.. 피어오르는 생각들.. 실타래처럼 얽힌 감정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과제들…
가을.. 하면.. 곱게 물든 단풍잎도 기다려지지만 언제부턴가 코스모스를 유난히 기다리고 있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반가운 친구가 다가오는 것처럼 어찌나 반가운지…
코스모스는 이런 제 맘을 알까요?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 보고 싶었던 엄마 무덤가에 다녀왔습니다.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요..
오랫동안 투석하신 엄마를 지켜보며 아무것도 대신 할 수 없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던 힘겨운 마음들…
어쩌면.. 그 때의 심정을 어느 해 가을에 이렇게 시로 적어 놓았기에.. 코스모스를 더욱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리운 마음을 정리해봅니다.
멀리 떠난 사랑하는 이를 이 가을, 다시 보고싶을 때 내 마음 낙엽 위에 시를 적어 바람에 띄워 보낸다면…
그대에게 전해주지 않을까요?..
이애경님의 시와 글을 여러 차례 읽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절로 떠오른 장면은 장모님이 병원에서 투석을 하는 장면과 돌아가신 후 고이 모셔진 강릉 어느 추모공원의 햇살이 넘치는 어느 무덤이었습니다.
이런 장면들이 떠 오른 이후 장모님의 얼굴을 떠올려 보니, 환하게 미소짓는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꽤 미인상이었던 장모님, 제가 갈 때마다 바다 먹거리를 좋아하는 오서방에게 한 상 가득 차려주시면서 밝은 미소를 지어주신 얼굴. 투석을 받으러 병원에 가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제가 밀어주었을 때에도 아픈 표정 하나 없으시고 저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던 미소. 제 마음에 떠 올랐던 장모님의 모습은 ‘환하게 미소진 얼굴’이었습니다.
설마 인생의 굴곡이 많았던 장모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환하게 미소를 짓지는 않았겠지요. 그런데 저에겐 그런 미소진 얼굴이 먼저 연상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저에게 화를 내셨거나 심한 소리를 하셨거나 했다면 제가 ‘장모님!’ 하면 그 미소가 바로 떠올랐을까요? 이렇게 저의 기억 속에 ‘장모님!’할 때 바로 미소진 얼굴이 떠오른 것은 오랜 기간 제가 장모님을 보고 듣고 말하는 과정에서 미소 짓는 ‘장모님의 상(이미지)’이 제 내면에 맺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애경님이 쓴 시를 읽을 땐 그러한 ‘미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시를 다 읽고 장모님을 떠오르려 했을 땐 그 모습이 저에겐 재연되었는데, 왜 시를 읽으면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참 의문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이애경님의 시 속엔 이애경님 자신이 느낀 ‘엄마의 상’이 맺혀져 있었고, 이애경님의 엄마에 대한 상은 ‘미소’가 아니었나 봅니다.
당연히 저보단 훨씬 오랜 세월동안, 훨씬 깊은 관계 속에서, 훨씬 깊이 맺혀진 ‘상’은 하나가 아닌 여러 상이 복합적으로 맺혀져 있었겠지요. 제가 저의 어머니에 대한 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맺혀져 있는 상이 서로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애경님의 시 속에서 느낀 것은 ‘매우 진한 그리움속에 느낀 어머니의 상’은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진 상’이었습니다. 저에겐 장모님하면 ‘미소’인데 이애경님은 아마도 ‘고통’인 것 같다는 것이지요.
시의 내용 중에 등장하는 ‘짙은 핏빛으로 붉게 물든 단풍잎새도’에서 느낀 장면은 가을 하늘에 빨갛고 곱게 물든 단풍잎이라는 아름다운 장면보다는 뭔가 유혈이 낭자한 그런 모습이 언뜻 지나가는 것은 ‘짙은 핏빛’이란 단어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등장하는 문장 중 ‘곪고 파인 상처의 깊이 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온 당신’을 대할 땐 이애경님의 눈에선 ‘엄마가 몸이 곪고 상처나서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모습’이 내면의 상으로 잡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고운 꽃잎 되어 수혈해 주었습니다’란 문장은 참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표현인 듯한데 그렇지 못한 것은 ‘수혈’이란 단어가 웬지 마음을 멈칫하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모습들은 모두 장모님이 병원에서 투석을 하는 장면과 연관되어 보입니다. 투석이란 피를 뽑고 그 피를 정제하고 다시 수혈하는 작업이며 또한 투석을 하는 이유는 당뇨와 관련되며, 당뇨합병증의 현상이 바로 곪고 파인 상처가 되겠지요.
저는 장모님을 떠올리면 좋은 모습만 떠올랐는데 이애경님은 엄마가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 것이지요.
이 시를 보니 이애경님이 엄마에게 다녀올 때면 몇 일동안 시름시름 앓았었는데, 그 이유는 엄마에게 다녀오면서 고통받고 죽어가는 엄마의 모습이 점차 그러한 엄마의 상으로 맺혀져 갔기 때문이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애경님의 다른 식구들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유독 이애경님이 그러한 상이 맺힌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다른 글에 여러 차례 나온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이제 자신의 양육자가 엄마임을 인지하게 된 아기 때에, 양육자가 외할머니로 갑자기 바뀜으로 생긴 버려짐, 그로 인해 생긴 첫 번째 자아상, ‘버림받은 어린아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시 엄마에게 돌아왔지만 이젠 생계를 위해 매일 자신을 하루 종일 떠났을 때, 이제 갓난 동생을 등에 매고 지내며 생긴 두 번째 자아상 ‘착한 어른아이’. 또한 장모님은 장모님대로 생긴 딸에 대한 ‘죄책감’. 이로 인해 딸에겐 무엇이든 잘해주려 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통하지 못한 그런 심리적 관계. 이에 더욱 매달리게 된 어린 이애경.
어머니가 투석받았을 때 이러한 어린아이와 어른아이가 번갈아 이애경님에게 작동되므로, 자신을 점차 떠나가려는 엄마를 더욱 붙잡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집을 치워드리고 몸을 주물러 주는 것 외에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자책감.
이러한 것들이 뭉쳐 작동함으로 완전히 번 아웃되곤 했던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제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이애경님이 엄마의 산소에 갔을 때, 이애경님의 마음 속엔 그러한 엄마의 상이 아직 남아 있었겠지요.
그나마 시 속에서 큰 위안이 되는 것은 ‘온 몸 휘감는 거친 바람 한가운데 따스한 햇살 그리워 살포시 얼굴 내민 코스모스에서도 당신과 함께 했던 시름들이 스칩니다’란 문장이었습니다.
코스모스. 따스한 햇살 그리워 살포시 얼굴 내민 코스모스지요.
이 시구는 ‘핏빛과 같은 단풍잎과 수혈해 주는 고운 꽃잎’과는 사뭇 다른 심리를 반영한 듯합니다. 특히 그 당시 엄마로 인해 느꼈던 많은 시름들이 스쳐가듯 털어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네요.
세월이 흘러 이러한 자신의 내면이 왜 이와 같이 형성되었는지 찾아가는 시간을 제법 가졌던 시기였기에, 이젠 이를 내면에 그대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면서 점점 그것에 메이지 않고 점차 자유스러워 가는 과정 중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이러한 자신의 심리를 반영하되
시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에 얽혀있는 부분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자기 위로의 과정이자 내적 치유의 과정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두분 모두 하늘 나라에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선 이러한 아픔들을 가진 존재들이었으나 그건 이 땅에서나 해당될 일. 코스모스가 가득한 하늘 나라에선, 두 분 모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다정다감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제 마음에 가득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