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힐링타임

이애경의 선물29: 시 내 앞에 마주 서는 날

이번 글은 이애경님의 29번째 선물, 시 ‘내 앞에 마주 서는 날’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누구 앞에 마주 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누구란 대상이 과연 ‘나 자신’이라면 어떨까요? 과연 이것은 쉬울까요? 이애경님의 시와 글 속의 사연을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애경의 내 앞에 마주 서는 날

이애경의 내 앞에 마주 서는 날

 

마주하기 두려워
긴 긴 세월 돌아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 앞에 마주 서네

폭우 몰아치는
절망의 바다
부표를 찾지 못한 채
다다른 바로 이 곳
지금 여기

더는 피할 수 없어
용기 내어 나를 대면하니
상처 입은 마음의 꽃잎들이
슬픈 눈물에 젖은 채
가느다란 신음소리 안에
갇혀있네

쓰러진 꽃잎들
한 장 한 장
그림자까지 닦아주고
위로의 손길 더하니

어느새 아물어
한송이 하이얀 꽃으로
새롭게 피어나네
다시 피어나네

며칠 전… 인생의 황혼이 드리워진 채 하이얀 꽃들을 피워 내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뵙고 돌아와 한 편의 시를 적어봅니다.

가기 전 날 밤도 잠을 설쳤지만 돌아 온 날 밤은 더욱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유가 제한 된 채 담장 안에 계시면서 노년의 시기를 보내고 계신 분들이셨습니다.

인생의 발달단계를 학자들마다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임종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평생에 걸쳐 단계에 따라 이루어야 할 주요 과업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여미며 숙연하게 느끼고 온 듯합니다.

비록 육신은 제한된 공간 안에 있을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기에 「스토리 테라피」라는 시간을 통해 새롭게 인생을 조명하며 지혜를 얻고 나를 아우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길 그 길에서 지금 나는 어떤 과제를 이루어가야 하는지 나와 그대에게 질문을 남겨 봅니다.

이애경과 노란 꽃

 

이애경님의 시를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시를 읽어보니,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고 첫 출발부터 어긋났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잘못 잡아 오랜 시간 빙빙 돌아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로 들려오더군요. 그래도 이 시의 대상은 더 이상 부초처럼 계속 헤매지 않고  어느 자리에서 멈춰 자신을 회복하는 느낌을 받았기에 다행이란 마음이 들더군요.

한편으론 시 내용이 참 서글픈데 정성스레 한올한올 쌓아 올린 시인의 마음이 느껴져 저 역시 뭔가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60이 넘는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처음부터 인생을 올곧게 살아온 것이 아니며, 이 시를 쓴 이애경님도 자신의 인생을 첫단추부터 바르게 꿰고 살아온 것이 아니며, 이 세상에 무수한 사람들이 있어도 그 사람들 중에 ‘인생을 참으로 바르게 잘 살아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란 생각. 그러하기에 이 시를 한줄한줄 신중히 읽은 사람이라면 ‘위로 받을 수 있겠다’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이 시의 배경은 ‘교정시설에 수용되어 형을 집행받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처음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글을 통해 이전에 이애경님과 제가 어느 교정시절에서 ‘이야기치료’를 한 기억이 나더군요.

이애경님이 그곳에 가기 전날과 다녀온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 전날은 교정시설에 처음 간다는 마음에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고, 돌아와서는 남몰래 이 시를 썼을 테니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애경님은 어느 사람이든 ‘지금 여기’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함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글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임종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평생에 걸쳐 단계에 따라 이루어야 할 주요 과업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여미며 숙연하게 느끼고 온 듯합니다.’라고 한 것은, 이애경님 역시 자신의 주요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겸허히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함을 알아차렸다고 한 것이지요.

인생 단계에 대한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에릭 에릭슨의 사회심리발달 8단계입니다. 첫 단계는 막 태어나 18개월 사이와 관련되며 이때 ‘신뢰냐 불신이냐’라는 단계를 마주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 단계는 태어난 아기의 의지가 반영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과 더 관련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제 첫 단추를 꿰는데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기 보다는 환경에 의한다는 것은 실로 억울한 감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맨 마지막 단계는 ‘자아실현이냐 절망이냐’의 단계로서 자아실현이란 인생과업을 잘 이룰 것인가 아니면 이를 이루지 못함으로, 인생의 결론이 ‘공허와 허무’로 둘러싸여 있고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 ‘어떤 가치를 매길 수 없으며’, 그러하기에 자신이 이 땅에서 살아온 것에 대해 스스로를 존중할 수 없어 ‘자기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은 심리에 빠지거나 반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매우 두려워 어떡하든 피하고 싶은 심리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더라도, 이로 인해 둘째 셋째 넷째 단추도 잘못 꿰었더라도, ‘인생의 결론은 절망’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의외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기회에 대해 이애경님은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네요. 

폭우 몰아치는 절망의 바다 부표를 찾지 못한 채 다다른 바로 이 곳 지금 여기

더는 피할 수 없어 용기 내어 나를 대면하니 상처 입은 마음의 꽃잎들이 슬픈 눈물에 젖은 채 가느다란 신음소리 안에 갇혀있네

쓰러진 꽃잎들 한 장 한 장 그림자까지 닦아주고 위로의 손길 더하니

어느새 아물어 한송이 하이얀 꽃으로 새롭게 피어나네 다시 피어나네

위의 시에서 보듯이, 막다른 골목에 떠 밀려 더 이상 피할 수 없어 용기를 낸 것이 새로운 기회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위의 시 내용은 자신이 자기를 마주하므로 ‘참된 자기’를 회복하는 심리 내용을 시어로 바꾼 것입니다. 특히 ‘그림자까지 닦아주고’라고 한 것은 ‘자신의 무의식 속의 어두운 부분들을 마주함으로 그 어두운 곳에서 울고 있을 자신의 어린 자아를 회복시켜주는 것’을 의미하지요.

결국 이애경님은 현재 그러한 교정시설에 있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작업을 한다면 인생의 마지막 단계의 단추를 잘 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지요.

“사람은 바뀌지 않아,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잘못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시에서 해답이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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