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삶을 살아갈 때에 언제든지 마음에 되새김질해 봅니다. 이 질문은 곧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비단 저 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인 질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자로서 이를 심리적 측면에서 ‘예수는 누구인가?’를 되집어 보았습니다.
1.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란 질문을 합니다.
그때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지요.
그리스도란 영어로 크라이스트(Christ)로서 ‘구원자,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즉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이지요.
그런데 필자는 심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예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이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믿으면서 자신의 마음의 병이 치유되고 평안을 얻었다고 하지요. 과연 예수는 사람의 마음과 관련되어 그 무엇을 하신 분일까요?
이에 대해 예수의 활동당시의 내용을 중심으로 개인의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
2. 예수의 활동당시 장면 별 질문하기
1) #장면1_예수는 누구인가
거친 광야에 예수와 제자들이 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로부터 예수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그 소식은 바로 그 당시 갈릴리지역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요한이란 선지자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었지요.
당시 유태인들은 로마의 속국에 있었지요. 로마는 정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황제를 대신에서 통치를 할 수 있도록 해당지역 출신의 사람을 뽑아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분봉왕이란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또한 그를 감시하는 로마의 총독을 파견하는 정책을 사용하였지요. 그 당시 분봉왕은 헤롯이었으며 로마의 총독은 바로 빌라도였습니다.
하지만 선민의식이 강했던 유태인들은 로마나 분봉왕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특히 야당기질이 대단히 강했던 갈릴리지역은 더욱 그들을 적대시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갈릴리지역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으며,
그는 예수에게도 세례를 주었고 예수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지칭하였었죠.
이 뜻은 예수가 바로 메시야임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헤롯왕을 비판하다 감옥에 잡혀 있던 중 헤롯왕의 생일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의붓딸 살로매가 헤롯의 생일 잔치에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후 그 대가로 요한의 목을 원했던 것이지요.
예수께서 요한의 죽음을 접했을 때, 제자들을 따로 두시고 조용한 곳에 혼자 있으시길 원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임 당함에 참으로 마음이 안타깝고 슬펐던 것이지요.
이전에도 그랬듯이,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선지자들의 최후가 대부분 비참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그의 마음은 남달랐으며 또한 애도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때에 군중들이 그가 있는 광야로 구름같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예수를 보기 위해 왔던 것이지요.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그들 역시 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마치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이 여겼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마음은 허망함과 애통함, 분노 등 마치 부모를 잃은 아이들처럼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들이 광야에 있는 예수를 무작정 찾아온 것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지목한 자가 바로 예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때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바로 그들을 맞이하십니다.
성경에는 그들을 맞이하는 예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아 안타깝다!’
이 마음이 가능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가 그들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서글프고 고단한 마음이 예수의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의 마음에 빈 공간이 있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또 다른 말로 요약하면 예수는 공감을 한 것입니다.
공감이란,
자신의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고.
타인의 마음을 그 빈공간에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불쌍한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해왔던 것이, 자신의 마음에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공감의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누구보다 빨리 느꼈지요.
그러하기에 슬픔있는 자에게는 함께 슬퍼해주고, 기쁨 있는 자에게는 함께 기뻐해줄 수 있었지요.
예수의 행적 중에는 유난히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 쫓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십니다. 물론 몸과 정신을 고치는 행위였지만 실제로는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치유했던 것입니다.
2) #장면2_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가 십자가에 죽기 전날,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신신당부의 말을 하셨지요.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한 줄로 요약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려면 선결조건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의 마음에 빈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제자들의 마음을 가져와야 합니다. 즉 이 말은 예수께서 해야 할 몫이지요.
그런데, 내가 너희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마음에 빈 공간이 있어야 하며,
그 빈공간에 예수의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즉 너희 역시 공감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란 말의 뜻은
예수와 너희가 서로 공감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지요.
예수는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들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비워 두신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비워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마음을 채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공감하기 보다는 예수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예수는 잘 알았기에, 심판날이 오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말씀할 것이라고 하셨지요.
3) #장면3_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의 양손 손목과 양발 발목에는 대못들이 박혀 있지요.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와 팔다리에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지요.
그 앞에는 그의 죽음을 큰 이벤트로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흐르는 피에 광란합니다. 자신들이 신의 아들을 죽이고 있다는 쾌감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십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는 깊이 숨어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심리학적으로 설명해본다면 다음과 같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수가 십자가 앞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내면을 프로이트가 말한 방식대로 들여다 본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아(이드)속에서 죽음의 욕동(타나토스)들이 흥분되어 날뛰고 있습니다.
타나토스란 죽음을 본능으로 하는 공격적 에너지가 폭발하며, ‘죽여라, 죽여라!’를 외쳐댑니다.
예수가 흘리는 피에 극도로 흥분되어 몸부림칩니다.
마치 고대 전사들이 싸움을 나갈 때 흥분제를 먹고 피를 흘리며 광란의 모습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예수의 눈에는,
그들의 내면에 들끓어 오르는 원초적자아의 몸부림을 본 것입니다.초자아가 그들을 꾸짖을 수도, 자아가 이를 중재할 수도 없는 상황!
마치 집단 무의식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을 예수는 보신 것이지요.
그렇게 광란하였던 그들도, 예수가 ‘다 이루었다.’하며 절명하시고 신의 노여움인가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을 때, 그때야 정신이 깨어 두려워하며 그 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예수는 무의식의 광란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3. 재질문_예수는 누구인가
우리는 다시 한번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한 예수는 누구인가요?
예수는 인간의 무의식조차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요,
인간의 아픈 마음을 공감해 주시는 분이며 ,
상처입은 연약한 영혼을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다면 다음의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늘 조용히 사색하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