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심리가 무엇일까란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심리란 ‘알아차림’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차린 내용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있었던 일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어느 한 선생님과의 통화
언젠가 저희 연구소에서 자기이해심리상담을 배우시는 한 선생님과 한 밤에 오랜 통화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심리적으로 많이 안 좋았던 것 같더군요.
그 분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이 마음의 균형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을 먼저 정지시키고 다독였다가 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왜 깨질까?’라는 것에 우울감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라는 짧은 탄식과 함께 한편으론 미소가 나오더군요.
그 분의 경우 자신을 알아차리는 과정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심리상담과정에서 보였던 그분의 모습은 상당히 밝고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반면, 감정에 대한 통찰이 다소 더디고 감정 부조화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함께 탐색해왔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분노, 슬픔, 두려움 등의 불쾌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것으로서, 어려운 생활에서도 들장미 소녀 캔디처럼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분들에게 좀더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일반적으로 이 분들은 캔디의 주제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와 같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무슨 일이든 바로 문제 해결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밝게 보이고 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지요.
참고적으로 캔디의 가사를 심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억압해서 그 감정을 느끼려 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밝은 모습만을 보이려 하는 심리적 모습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 이유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위험에 처한 어린아이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하나의 각본으로서 일종의 자기생존을 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매사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려는 측면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어떡하든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상대방이 슬픈 감정, 화난 감정, 두려운 감정 등을 드러낼 때에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것이다’란 상황설정에 의한 감으로 받아들이며, 상대방의 감정을 재빨리 유쾌한 감정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감정을 사실적으로 공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감정에 자칫 물들거나 무너질까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 슬퍼하시는 것은 이해해요. 하지만 힘을 차리고 밝게 웃으세요’라는 식입니다. 공감하는 것 같으나 진정한 공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언젠가는 자기자신에 대해 깊은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불쾌한 감정에 대해 미숙함이 자기자신과 부딪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심리는 각양각색이지만 일반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느낌에서 오는 혼란이지요.
2. 심리의 알아차림의 단계
그 때, 그 선생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제가 강의 중에 선생님들께 ‘알아차리다’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혹시 ‘알아차리다’의 단계를 기억하시는지요?”
예, 알아차리다는 ‘알다 → 이해하다 → 깨닫다 → 수용하다’의 단계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현재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다고 느끼시나요?”
청소년들과 이야기 나눌 때 흥미로운 것은 ‘저도 알아요!’란 대답을 참 잘한다는 점입니다. 제 질문이 심리나 인생에 대해서인데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이야기는 ‘들어서 알아요, 배워서 알아요’입니다.
그때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나요? 라고 묻는다면 그 때는 머뭇머뭇거립니다.
‘이해하다’란 들어서 혹은 배워서 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해하다’란 생각을 통해 그 의미나 원리를 정확히 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설령 ‘이해하다’일지라도 그것은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려 주거나 가르쳐 준 사람의 것이지 아직 내 것이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멈춰 버리곤 합니다. 그러하기에 배움과 생활이 일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다’의 다음 단계는 ‘깨닫다’입니다. 이 단계는 통찰함이 필요합니다.
- ‘이해하다’와 관련된 ‘사고’가 합리적인 것이라면,
- ‘깨닫다’는 비합리적인 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관을 통해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그것이 ‘내 것’이 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수용하다’가 됩니다. 마치 이전부터 그것을 알고 써왔던 것처럼 느껴지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설 때 비로소 심리적 자율성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 후에 그 선생님께서 저에게 카톡으로 장문의 문자가 왔습니다. ‘알아차리다’에 대한 자기 통찰!
그 분은 그렇게 자신을 알아차림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심리란 알아차림이다.
이 말은 우리 삶 속에서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삶은 남의 것을 흉내내기만을 하다 좌절할 수 있으며, 타인의 것을 마치 자신의 신념인양 오해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잘 하는 사람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현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이란 현자가 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3. 정리 및 소감
어린 시절엔 ‘알다’에 매달렸다면 청소년기와 청년기에는 ‘이해하다’에 매달린 것 같습니다. 모두들 타인이 저에게 알려준 것들이지요.
하지만 아직 완전히 내 것이 안 되어 인생에서 항상 물음과 괴리에 빠져 힘들어 했던 시기였던 같습니다.
‘깨닫다’가 조금씩 시작된 시기가 어쩌면 40대부터였고 여전히 그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는 40에 ‘지천명’이라고 했는데 여전히 ‘깨달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것’이지요. 이제 ‘알고 이해하며 깨닫고 수용하다’가 되어 현자가 되면 좋겠는데 언제 그렇게 될지 스스로 자문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시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알아차림을 하려고 노력하는 분들로 보입니다.
신달자 선생님의 시 ‘오래 말하는 사이’를 링크를 걸어 소개해 드립니다. 이 분 역시 알아차림의 통찰의 과정을 밟고 있음을 시를 통해 느꼈지요.
오늘도 저희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