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태초의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 글은 시편 62편의 말씀이자 매우 알려진 가스펠송인 ‘오직 주만이’에 나오는 가사, ‘나의 영혼이’란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마음이 슬플 때, 낙망될 때, 모든 것이 멈춘 듯 아무 생각이나 느낌이 사라지는 듯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음악이 흐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여러 음악이 내 마음 속에서 흐르곤 했지만, 오랜 시간 흘렀던 마음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친구가 작곡 작사하였고 그 친구가 이 노래로 대상을 받는 것을 세종문화회관에서 목격했었던 노래였지요.
이젠 목사인 이유정 작사 작곡인 가스펠 송 ‘오직 주만이’입니다. 이 노래를 SNS에서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로 검색하면 다양한 악보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 시편 62편의 1절이 이 노래의 첫 소절과 같기 때문입니다.
1. 다윗의 ‘나의 영혼이 잠잠히’
시편 62편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자 솔로몬왕의 아버지이며, 예수님의 조상을 언급할 때에 아브라함과 함께 앞 선에서 거론되는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이 60살쯤 되었을 때 그의 아들 중 그가 매우 사랑하였던 압살롬이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왕궁에서 도망가면서 쓴 시로 알려져 있지요.
30세에 왕이 되어 40년간 왕으로 살았는데, 그의 70평 생 중 60살 쯤 생긴 일이니 인생 후반기가 매우 기구하였고, 주위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의 내면은 매우 고독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으나 태생부터 기구하게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다윗이지요. 그런데 그가 쓰러져야 할 상황에서 결국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뚝심을 보인 것은 그가 신앙이 좋은 것도 있지만 그가 시편과 같은 글을 썼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글이란 말과 달라, 몇 차례 곱씹어야 나오며, 또 나온 글을 몇 차례 수정해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좀더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부터 평생 펜을 놓지 않았으며, 그의 주제는 그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소통이었기에 자신을 애써 포장하여 잘 보이려 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 글로 드러낸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은 전쟁을 잘한 것도 아니고 정치를 잘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과의 소통을 주제로 펜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친구 이유정 목사는 이 시편 62편을 다음과 같이 재정리하였습니다. 이 정리된 내용은 또 다른 시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유려하며,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의 자세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이유정의 ‘오직 주만이’ 가사
먼저 그 가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 ‘나의 영혼이’에 대하여
그런데 이 노래가 내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흐를 때 모든 가사가 흐르기 보다는 일정 부분만이 무한반복 되듯이 흘렀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앞의 구절이 반복되다가 말미에 있는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가 가끔 들렸었지요.
그렇게 노래가 반복해서 흐르고 나면 제 마음이 좀더 안정되고 평안해지곤 했었는데, 이 노래가 반복되었던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 노래 가사가 ‘나의 영혼이’라고 되어 있네.’
30년 이상 알아 왔던 노래이고, 시편에서 다윗이 ‘나의 영혼이’이란 단어를 자주 표현했었는데 이에 대해 한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영혼’이란 단어에 마음이 갔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었으니까 시인은 영혼이라고 표현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넘겼지요. 그런데 ‘나의 영혼이’란 단어가 깊게 다가온 것입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나’란 사람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아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나란 존재’란 뜻입니다.
이를 신앙과 연결해서 보면, 신께서 인간을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존재’로서 만들었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흙으로 인간의 육체를 빚은 후 생기를 불어 넣었으니, 생기가 육신에 들어가므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기에 육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과 직접 관련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이란 단어는 구약성경 고대 히브리어로 ‘네페쉬’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생명의 기원, 감정과 정신적 상태, 생명의 유지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한국어로는 ‘생명, 정신, 영혼, 또는 생명력’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나의 영혼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 것은, 이 문장을 ‘내가 나의 영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의미’로 탐색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크게 ‘어버이자아, 어른자아, 어린이자아’로 나누기도 합니다. 이때 어른자아를 건강한 어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간혹 듣게 되는 ‘내면아이’란 말이 있습니다. 마음속의 어린이라는 뜻인데 어린이자아와도 유사합니다.
또한 ‘내가 나를 바라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나의 어른자아가 나의 어린이자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혹은 나의 어른자아가 나의 어버이자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다’란 뜻을 가집니다. 즉, 내가 나를 제3자적 입장에서 바라본다고 할 수 있지요.
이와 같이 심리학에서는 내가 나의 내면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며, 그러한 훈련을 받기도 하며, 이것은 심리적 균형을 유지시키는 대단히 중요한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란 사람이 나를 표현하길 ‘나의 영혼’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내포하고 있을까요?
이는 대단히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영혼이란 결국 나란 존재의 주체가 되며, 또한 신이 불어넣은 생기로서 신과 나와의 관계를 전제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로 표현하는 것보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표현한 것은 보다 신앞에서 나란 사람을 객관화하여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 문장은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의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임을 전제로 한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와 같이 자신을 ‘나의 영혼’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 앞에서 자기객관화를 여실히 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문장으로서, 그러므로 그는 신 앞에서 발가벗겨진 존재임을 인정하고 자기를 스스로 포장하거나 속이려 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즉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사람이 된 비결이기도 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장 28절)
영혼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심리란 인생이 살아있는 동안에 대한 것이라면 신앙이란 살아있을 때와 육신이 죽어 있을 때에도 적용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생각되는군요.
3. 소감 및 정리
제가 ‘나의 영혼이’에 깊이 생각하게 된 동기는 어쩌면 나의 가장 사랑했던 이가 육신을 이 땅에 두고 그의 영혼이 신께로 돌아갔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영혼이 떠남을 통해 ‘저의 영혼’이 시편의 ‘나의 영혼이’에 더욱 집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어버이자아, 어른자아, 어린이자아를 잘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이 어떤 자아상태에서 살아가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친다면 그 사람은 현생에서는 좀더 잘 살지언정 사후에 대해서는 변수가 많을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영혼’을 항상 인식한다는 것은 나의 생과 사의 모든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며, ‘나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순전한 마음으로 가지기를 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이라도 이를 깨닫게 된 것, 참 감사한 마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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