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인터넷에서 자주 올라왔던 내용 중에 배우 황정음씨의 이혼소송이 있었습니다. 황정음씨의 남편은 이영돈씨로서 프로골프선수 출신이지요.
아이돌 가수출신이었던 황정음씨는 연기자로 전업한 이후 점차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며 한참 인기 최정상인 시점에서 결혼했었기에 당시 그녀의 결혼 결정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 하기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데 약 3년 전에 이혼소식이 한참 떠들썩하다가 이들이 재결합하여 잘 산다는 소식들이 들리곤 했는데, 이번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온 것 같습니다.
이혼 사유는 남편의 불륜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황정음씨가 자신의 이혼과 관련 SNS에 올렸고 황정음씨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댓글 설전을 벌였는데, 그녀의 이야기 중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내가 원래 참지 않는 사람인데 한 번은 참았다” 였습니다. 즉 “3년 전에도 남편이 불륜을 저질렀으나 남편이 잘못을 빌어서 참았었다. 하지만 두 번은 참지 않는다”란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참았다’란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지요.
1. 황정음씨의 ‘참음’에 대한 심리학적 견해
이를 감정과 연결해서 살펴보면,
“당신이 불륜을 행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잘못된 것이야. 그래서 나는 매우 화가 났어.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잘못을 빌고 있으니 나는 이번엔 나의 분노를 참을게”가 됩니다.
즉 “상대방이 정당한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생긴 나의 분노를 참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녀 입장에서 보면, 분노를 참음으로서 남편과 결혼생활을 지속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불륜이 재발됨으로 그녀는 “분노를 더 이상 참지 않는다”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참는다”란 말은 분노 뿐만 아니라 감정들과 밀접합니다. ‘슬픔을 참는다’, ‘두려움을 참는다’, ‘역겨움을 참는다’, ‘부끄러움을 참는다’, ‘부러움을 참는다’ 등으로 감정들을 참는다고 할 때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감정을 참는다’는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그 감정을 참는다는 것은 그 감정이 완전히 없어짐을 의미하는지와 연결해 살펴본다면, 그렇지 않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감정을 안으로 가라앉힌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참을 수 있는 것은 분노 등 그 감정이 자신이 참아낼 수 있는 한계를 초과하지 않았다라는 뜻도 될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감정과 관련, “스탬프를 찍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탬프를 찍는다’를 예로 들면, 치킨집 등에서 고객이 상품을 구매하고 10번의 도장을 찍으면 한 차례는 상품 등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받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은 10번을 찍었다는 것은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한도를 다 채웠다’는 것이 되며 ‘무료로 받는 것’이란 감정을 수용할 수 있는 한도를 초과하여 그 감정이 폭발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즉 황정음씨가 ‘참았다’는 것은 분노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쌓아 두었지만 이 분노를 참을 수 있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불륜에 의해 이번에 폭발한 분노의 크기는 ‘현재 사건으로 인해 생긴 분노’와 ‘이전 사건에 쌓아둔 분노’의 합이 될 것입니다. 즉 ‘분노를 참는다’란 것은 그 분노를 자신의 내면에 계속 쌓아두는 것이고 이것이 언젠가 더욱 크게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음’이라는 것과 별개로 ‘용서’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2. ‘용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황정음씨의 말을 빌면, 그는 ‘참았다’라고 했는데 그 때의 ‘참았다’와 ‘용서했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최근 축구 선수 손흥민과 이강인의 불화설이 있었고 이강인씨가 손흥민씨를 방문하여 잘못을 사과했고 손흥민씨는 자신은 용서했으며 팬들도 이강인씨를 용서해달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사전적 의미의 용서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 관용(寬容)을 베풀어 벌하지 않음
- 꾸짖지 아니함
- 놓아 줌의 뜻을 가집니다.
즉 사전적 의미로서는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 잘못에 대해 벌하지도 꾸짖지도 아니하고 놓아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심리적 의미의 용서
심리적 관점의 다양한 용서개념을 대략적으로 묶어 설명하면,
- 용서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감정과 태도의 변화를 통해 복수나 증오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버리고 자비와 연민을 베풀어 주는 것
- 용서는 잘못된 행위를 용납하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파괴적 분노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
- 용서는 인간의 의무이자 덕목이기도 하며,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할 수 있음
가 됩니다.
3) 용서에 대한 전제
그런데 좀 더 심리적 관점의 용서를 실제적으로 적용하려면,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이화여자대학교의 목회상담전공의 손운산 교수가 쓴 ‘용서와 치료’의 내용을 빌리면 그 전제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용서는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가해자를 위한 것인가?
- 용서는 사건인가 과정인가?
- 상처의 치료가 먼저인가, 용서가 먼저인가?
- 용서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참회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 원한은 부정적 감정인가 정당한 감정인가?
- 여성들의 용서는 다른가?
4) 용서의 전제에 따른 적용
첫째, 용서는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가해자를 위한 것인가?
용서는 피해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피해자에게 용서하라는 압박이 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 측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용서를 해주라는 압력을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압박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잘못된 용서를 유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사건인가 과정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건이 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용서하는 것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해를 입은 사람의 다양한 상태에 따라 용서의 과정이나 그 시간은 다를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을 주었으니 이젠 용서할 수 있지 않은가?”로 압박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상처의 치료가 먼저인가, 용서가 먼저인가?
상처의 치료가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온전한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상처의 치유가 완성된 다음에 용서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한 자가 오히려 나중에 고통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넷째, 용서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참회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가해자의 참회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용서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감정과 태도의 변화를 통해 복수나 증오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버리고 자비와 연민을 베풀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정서를 버리는 것이기에 가해자의 참회가 없더라도 자신의 부정적인 정서를 버리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용서는 나는 심리적으로 편할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잘못함’을 용인하는 구조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 자신의 심리적 측면에서는 용서를 하되,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도록 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원한은 부정적 감정인가 정당한 감정인가?
여기서 원한이란 황정음씨에게 적용한 분노란 감정이 될 것입니다. 분노란 감정은 자신이 ‘정당한, 정상적인, 당연한’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며, 그러한 상황에서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상담 현장에서 볼 때 많은 경우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을 때 분노를 드러내지 못함’으로 인해 심리적 문제들이 생기게 되며, 매우 고통스러워 합니다.
여섯째, 여성들의 용서는 다른가?
사회적 구조에서 여성들에게 ‘착한 여자’를 많이 강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착하기 위해서는 용서를 빨리 해야 합니다. 이러한 Frame이 여성의 용서를 강요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참음과 용서의 차이
사회에서 많은 경우 참음과 용서가 서로 혼재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 이전 황정음씨 단란한 가정모습을 보면서 ‘황정음씨가 남편을 이전에 용서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황정음씨 입장에서 보면 ‘이번에 참아준다’란 것이 ‘용서한다’로 보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이를 위해 성경에 ’70번의 7번을 용서하라’란 말씀을 참고해보겠습니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70×7 즉 490번을 용서하라는 뜻이 됩니다.
과연 이것이 인간에게 가능할까요?
이 때의 ‘용서’가 ‘참는다’는 뜻이 내포되는 경우에는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불가능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스탬프를 찍는다’와 같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초과하는 경우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참고 참으면 언젠가 폭발할 수 밖에 없는 심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나 의지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용서’란 ‘참는다’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이라면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해소를 한다는 것’은 0으로 만든다는 것이며, 이 경우에는 ‘참는다’와 같이 이전의 분노의 감정을 불러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 40의 분노의 감정이 생기며 상대방이 5차례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하면, 계속 참아온 사람은 현재 시점에서 200의 감정이 폭발할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하는 과정에서 분노의 감정을 0으로 만들었다면 5번째 느끼는 감정은 오직 5번째 잘못에 의해서 생기는 40이 될 것입니다.
참는 것과 용서에 따른 감정의 크기는 200과 40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490번의 용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5. 정리 및 소감
위의 내용들을 살펴볼 때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분노의 감정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서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크게 다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정음씨가 말한 ‘나는 참았다. 하지만 더 이상 참지 않겠다. 그 결과, 나는 이혼을 하겠다’라고 한 것은 용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참음’을 선택한 귀결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잘못된 용서나 압력에 의한 용서보다는 그 자신으로 볼 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시기는 자신의 분노를 완전히 해소할 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연민의 감정까지 가질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충분히 경험한다면 아마도 누군가를 용서할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황정음씨와 같은 케이스에서 ‘용서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생각할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또 다른 측면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지만 화해는 안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불륜의 계속 범할 수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할 수는 있어도, 그런 상대와 한 이불을 계속 덮고 산다는 것은 별개란 뜻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