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제 마음을 들여다 보았던 것을 이웃들에게 공유한 것입니다. 문장이 평어로 되어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감정 ‘비통’을 주제로 작성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비통히 여기시고’
지난 주말에 성경공부가 있었어. 봄철이 되어 성경공부모임을 참석하게 된 거지. 성경공부 본문은 요한복음 11장 36~46절로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내용.
성경공부교재를 따라 공부를 하는데 주요 내용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찾아갔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 즉 베다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과 마르다의 반응에 대한 내용이었어.
예수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 반면에 그 반대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 또한 마르다. 나사로가 사망한지 나흘이나 되었기에 무덤문을 여는 것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 그녀는 나사로가 마지막 때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그 때에 부활을 하겠지만, 현세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었던 거지.
이 성경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신념들이 있었고 또한 그러한 신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막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성경공부를 할 때 내 마음에 자꾸 눈길이 간 성경구절은 예수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셨다는 내용이야. 예수님께서 비통하셨단 내용이 두 차례나 나와.
비통.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몹시 마음이 아픈 슬픔. 마음이 아프도록 몹시 슬퍼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어. 심리와 뇌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너무 슬퍼서 감각에 통증이 왔다는 뜻이기도 해. 성경에 애통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거든.
예수님께서 그 당시 비통의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지.
성경공부를 마치고 계속 머리 속에 이 단어가 맴맴 돌았어. ‘정말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매우 슬퍼했을까?’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그 곳에 가셨는데 그가 죽어서 슬퍼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안 맞아 보였거든.
슬픔은 상실의 감정이야. 무언가를 잃어버려 마음이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는 뜻이거든.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를 잃어 이런 마음을 느낄 이유가 없잖아.
아무리 봐도 한국어 ‘비통하다’란 단어가 이 당시의 예수님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요한복음을 쓴 당시의 헬라어를 찾아보았어. 그 단어가 한국어 발음으로 ‘엠부리마오마이’. 그 단어의 뜻은 ‘코를 세게 내쉬다’란 뜻이며 이를 좀더 설명하면 ‘격한 감정을 내적으로 억누르다. 분노하다. 강하게 동요하다’라는 뉘양스를 가진다고 설명하더라구. NIV 등 영어 성경들을 찾아보니 주로 사용한 것이 ‘was moved’ 였으며, 어느 성경에는 ‘angry’, ‘groaning’도 있어. 이를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선 이 당시 복합감정 혹은 양가감정을 느꼈다고도 할 수 있지. 그 감정들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와 어느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어.
분노.
이 감정은 정당한 것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 그렇게 받아들여 지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거든. 그러하기에 이 감정은 다시 정당하게, 당연하고 정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지.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또한 나사로의 무덤에 따라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쏟아 냈잖아. 그 말 속엔 무지함은 물론 악의가 많았잖아. 특히 악의의 경우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이슈화하려는 저의가 있었던 것이니까. 정당치 못한 내면과 행위의 모습이었지. 그러니 주님이 분노를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던 거지.

그런데 다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볼 때 두 단어가 먼저 생각나더라. 바로 동감(sympathy)과 공감(empathy).
동감(同感)은 말 그대로 상대방과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야. 마르다와 마리아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을텐데, 동감이라면 예수님도 슬픔을 느꼈다는 뜻이 되잖아. 하지만 앞에서 말했 듯이 예수님은 이때 슬픔을 느낀 것이 아니잖아. 그러니 동감하지는 않았겠지.
그렇다면 공감(共感). 공감이란 타인의 상황과 감정을 느끼고 이를 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거든.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비가 영영 떠나 이생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한다는 상실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계를 보셨던 것이고 또한 그들이 그들의 상태에선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신 것이지. 그러니 그때 예수님께서 느끼신 감정은 연민이라고 할 수 있어.
공감을 통해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될 때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개입해서 상대방의 문제를 돕고 해결해주려는 마음이 생기거든.
사람들 중엔 불쌍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저 동정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우려고 발벗는 것은 그 마음이 움직여 연민을 느꼈다는 뜻이 되는 것이거든.
예수님께선 처음에는 분노의 강도가 컸다가 점차 연민의 강도가 더 커졌던 것 같아.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옆에 있음에도 그저 슬픔에만 젖어 있는 사람들. 모두 연민의 대상들로 받아들이신 거지.
그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한 말씀이 있어. 바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은 마르다에게 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한 말씀일 수도 있겠더라. ‘내가 안타깝고 불쌍한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겠어.’
그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셨잖아.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리고 바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셨잖아.
이러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셨다는 것이고 연민을 느끼시기 앞서 그들을 공감하셨다는 것이지.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자주 보여주신 모습이야. 공감하시고 연민하시어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심.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란 대목에선 여전히 의문이 사라지지는 않았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타인의 슬픔에 동감을 하면 눈물을 흘리지만 공감을 할 때는 눈물까지는 잘 흘리지 않거든.
그런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어. 그 이유를 묵상해 보니 한 가지 밖에 답이 없더라.
그건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셨잖아. 이 말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만 기본적으로 대단히 순수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 마치 어린 아이처럼 꾸밈없고 거짓이 없는 그런 마음.
돌이켜 보니, 이 당시의 예수님의 마음들을 팔복에서 찾아보면, 심령이 가난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 화평케 함 등 여러 모습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선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도 있었잖아.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에게 알린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의 의도는 뻔하잖아. “너희들 뭐하니, 빨리 예수를 제거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시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 믿음을 선물하고 있는데, 그것을 거절하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잖아.
예수님의 감정을 통해 이와 같이 묵상해 보니까 나와 관련된 여러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 아내가 사망한 바다에서 망연자실했던 나의 모습. 매우 무력했었지. 그리고 그 날 한밤중에 딸애와 같이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던 장면. 그 가운데 주님께서 주셨던 말씀들.
그 당시,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는 이미 사망한 아내를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던 것, 나를 연민하셨던 장면이었음을 깨닫게 되네.
“의인은 자기 아버지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말씀은 결국 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한 말씀임을 이제야 깨닫게 되네.
이렇게 깨닫고 보니 내 마음이 몹시 두근거리고 난리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