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각자는 자신과의 대화를 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자아는 하나가 아닌 두 개 혹은 세 개도 등장할 것입니다.
이때 그 자아 중엔 ‘나’로 표현되는 자아, ‘너’로 표현되는 자아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아래의 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안도현의 시 ‘무식한 놈’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절교)다!
짧은 시면서 한방 제대로 먹이는 듯한 시이지요.
시인 안도현은 ‘연탄시인’이란 닉네임이 있습니다.
‘너에게 말한다’란 시에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고 짧으면서도 강력한 한방을 남겼지요.
정작 본인은 연탄시인이라고 불리기 보다는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 ‘내성천시인’으로 불리길 원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내성천은 그의 데뷔작인 ‘낙동강’의 지류를 이루는 개천입니다.
2. ‘무식한 놈’ 속의 너와 나
그런데 위의 시를 처음 대하실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요?
일반적으로 시인은 독자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시를 통해 무언가를 이야기한 것을 독자를 ‘자극한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시를 읽고 난 후 독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시인은 독자에게 자극을 주고 독자의 반응을 받으며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가 아니더라도 자극과 반응은 서로 다른 대상이 서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자극을 통해 대화를 시도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인의 ‘자극’ 측면에서 적어보겠습니다.
맨 처음 시인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란 두 개의 가을국화를 등장시켰네요.
가을의 산천에 지천으로 깔려 있지요. 살펴보니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별하기 쉽지 않더군요.
위의 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실제 많은 사람이 안도현씨에게 절교 당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요. 저도 포함되고 말입니다.
아마 이 시를 읽은 안도현씨 주변 사람들이 안도현씨를 슬슬 피하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조금 드는군요.
그런데 시인이 두 꽃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을 훈계하려고 이 글을 썼는가 생각하니 그건 아닐 수 있다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 시를 잘 살펴보니 두 주체인 ‘너’와 ‘나’가 과연 누구인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이 시를 썼을 때
‘나’는 안도현 시인인데,
‘너’는 누구일까?
함께 그 길을 걸었던 그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시를 읽는 독자를 염두해 두고 말한 것일까?…’
이 부분을 곱씹어 보니 ‘너’는 안도현 시인 자신일 가능성이 제일 커 보이더군요.
제 말은 안도현 시인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자신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읽혀집니다. 즉 이 시는 시인과 타인과의 대화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과의 대화일 수 있겠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글을 세상에 내 놓을 때는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시인과 자신과의 대화로 시작했다가 저와 같이 자신과 자신과의 대화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까 생각되더군요.
3. 에릭 번의 세 자아와 자아간의 대화
왜 이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자아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에릭 번에 의하면 나란 사람 안에는 크게 어버이자아, 어른자아, 어린이자아란 세 명의 자아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는 1인칭으로서 나 자신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너’ 역시 1인칭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버이자아상태에서 나 자신에게 말한다면 ‘너는’ 이란 주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너, 참 못났다~ 그런 것에 울고 있니? 그럴 때에는 이렇게 하면 되잖아’
라고 말했다면 그건 어른자아가 어린이자아에게 말을 한 것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상담사가 내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합니다.
“선생님의 내면아이가 아프다고 울고 있네요. 이런 아이에게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요?”
이때 내담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겠습니다.
“누구야~ 그래 정말 힘들게 살아왔구나. 괜찮아 괜찮아 지금까지 넌 잘 살아온 거야~”
이때 말하는 사람도 그 대상도 모두 ‘나’인데 이와 같이 ‘어린 나’를 다독이는 그 ‘나’는 어버이자아인 ‘나’일 수도 어른 자아인 ‘나’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내면아이는 어린이 자아 상태에 있는 ‘나’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자아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 그 자아들은 모두 ‘나’인데 상호간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내 안의 서로 다른 사람(자아)들이 대화를 할 때 자기 자신을 ‘나’라고 하며, 다른 자아를 ‘너’라고 부르면서 대화를 하지요.
시인의 시로 돌아가 보면, 시인은 ‘나여’라고 자신을 굳이 지칭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더욱 주체화한 것입니다.
추측컨대, 이 때의 ‘나여’란 어버이자아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너’는 어린이자아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나’라고 칭해진 어버이자아가 ‘너’라는 어린이 자아에게 절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그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너.
마치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너란 꼬마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안타깝다는 것이지요.
실제 자신의 자아끼리 절교한다면 인간심리는 대단히 힘든 상황에 처해집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절교란 자신을 다그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 꽃들을 매일 보면서 그 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하잖아!’
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의 다른 시 ‘너에게 말한다’란 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자아인 내가 어린이자아인 너에게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라고 훈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다른 시인들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 시인 안도현의 시를 읽다보면 ‘나’ 혹은 ‘너’란 단어가 자주 나오며 이들간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아마도 시인은 평소에 자기자신과 자기자신과의 대화가 많으며, 이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을까 생각드는군요.
그것이 그의 시에 반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의 시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4. 정리 및 소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와 나와의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보통 여러 나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나가 독백하듯이 나오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마치 햄릿의 유명한 대화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와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독백과 같은 대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나가 대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장면이 나오면 ‘혹시 정신질환자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실제론 이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력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여러 나는 어떤 나인가를 구별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또한 그러한 나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그 말속의 숨은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것이 심리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심리를 잘 분석한다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
나와 나와의 대화. 이를 잘 할 수 있는 사람들. 저는 참 멋지다고 생각되는데 어떤가요?
이런 자신과의 대화가 많은 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이전에 블로그에 올린 내용인데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탐색 을 읽어보시면 흥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군요.
핑백: 나의 죽음에 대한 심리, 어린이자아란 녀석이...